치유하는 영어

스몰톡의 힘: 인사를 믿는다는 것

RomiT 2019. 3. 22. 15:15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평년보다 따스한 날씨가 지속되다 갑자기 밤새 기온이 뚝 떨어졌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불평할 여유도 없을 만큼의 숨막히는 추위에 꾸물꾸물한 회색 하늘이 내가 처음 만난 뉴욕이었다. 


검색대를 거쳐 밀고 나오다 너무 무거워 세 걸음에 한번씩 나를 멈추게 했던 이민가방에는 생뚱맞게 김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는 마치 캠핑 떠나는 사람처럼 코펠을 싸주었고 나는 저항할 힘도 없어 그 짐을 들고 비행기를 탔었다. 한번도 자식을 유학보낸 적 없는 부모는 휴대용 냄비와 대용량 포장된 김을 커다란 짐가방에 쑤셔넣으며 주문처럼 다 필요할 거라고 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배낭에 크로스백 하나에 커다란 이민가방, 그리고 또 더플백이 하나가 있었다. 기내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당황해서 빈 쇼핑백에 옷을 쑤셔넣어 오히려 짐을 더 늘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10키로쯤 나가는, 단단한 체구에 겁먹은 눈을 한 황구 믹스견을 데리고 있었다. 열네 시간의 비행을 거치느라 계속 덜덜 떨었을 개는 이동장 안에 똥오줌을 싸놓아 냄새가 풍겼다. 

팔이 세 개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힘들고 무거운 게 문제가 아니고, 말 그대로 이 짐과 내게 딸린 모든 것을 한번에 이동시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목을 옷걸이처럼 썼다. 걸 수 있는 건 모조리 목에 걸고 어깨에 두르거나 멜 수 있는 건 서너개씩 걸쳤다. 다리로 개가 든 이동장을 밀면서 몸으로는 짐가방을 날랐다. 가다 서다 하는 나를 보다못해 공항 직원이 와서 개 이동장 위에 작은 가방 하나를 얹어주고는 휙 가 버렸다.


나는 그렇게 난민처럼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절대 잠들지 않는 도시에. 친구도 친척도 없었고 나를 마중나온 사람도 없었다. 어찌어찌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질린 눈을 하고 그 모든 짐과 개를 차곡차곡 실어주었다. 말이 통하고 집 구할 돈이 있으니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큰 도시에서 나랑 조용한 개 한마리 같이 지낼 방을 삼일 안에 못 구할 이유 없지, 라며 학교 가까운 곳에 에어비앤비를 3박 예약해 뒀었다. 딱 세 밤. 세번째 밤이 지나면 이 손가락이 곱는 추위에 나와 개는 갈 곳이 없어질 거였다.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깨달음이 닥치자 나는 배가 고프지도 졸립지도 않았다. 

노숙자의 꼴을 하고 노숙자의 처지가 되자 뇌에 비상모드가 가동되었다. 나는 오로지 필요한 일만을 하고 필요한 말만을 했다. 너무 추워서 아무도 없는 거리에 서서 구글맵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인터넷에 나온, 조건에 맞는 방이란 방은 전부 체크한 뒤 전화를 걸었다. 뉴욕의 공인중개사들은 차갑고 거만했다. 집 보러 오는 사람은 너무 많으니까 이것저것 묻지 말고 일단 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학교는 맨하탄 다운타운에 있는데 나는 강을 건너 어디든 집을 보러 갔다.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한시간 반 걸리는 공장지대에 있는 집을 보러간 적도 있다. 그래도 조그만 뒤뜰이 마음에 들어 계약하겠다고 하니 이전에 방 보러온 사람이 벌써 계약금을 걸고 갔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개는 조용히 혼자 스트레스를 견디며 용변도 보지 않았다. 빨리 쉬든 응가든 하렴, 중얼거리며 칼날같은 강바람이 불어오는 거리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이런 날씨에는 개를 데리고 나오면 안된다고 소리를 지르고 지나갔다. 울 시간도 없었다.


와중에 학교에는 가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비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을 인터뷰해야겠다고 했다. 대학원 수업을 수행해낼 수 있는 언어를 갖추고 있는지 다시 한번 봐야겠다고.


항공담요 위에 엎드려 불안하게 나만 쳐다보고 있는 개를 방에 두고 하염없이 걸어 시험장에 도착했다. 내가 여기 공부하러 온 게 맞긴 하던가? 온갖 불안과 공포 때문에 커피 한잔 사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4달러짜리 라떼를 마시면 갑자기 집 구할 돈이 전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길가는 내내 구글맵을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에 장갑을 낄 수도 없어 손은 항상 차갑고 감각이 없었다. 동네 슈퍼마켓에조차 들어갈 용기가 없었으니 누구와 말 한마디 해본 일도 없었다.


언어중추가 마비되었는지 내가 가진 모든 언어가 사라져 버렸다.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로 글도 쓸 수 없었다. 일기를 쓰고 싶었는데 아무말도 적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불안한지, 울고 싶은지, 또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이것 저것을 후회하는지 언어로 꺼낼 수가 없었다. 


큰 방에 모인 학생들은 시험관이 한 명씩 데리고 다른 방으로 흩어져갔다. 나도 로비에서 받은 뜨끈한 차를 한 잔 소중히 받쳐들고 무심하고 건강해 보이는 시험관을 따라 작은 교실로 들어갔다. 그는 안경을 쓴 중년의 백인 여성이었고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How are you? 어떻게 지내냐고.

어떻게 지내냐니, 할 말이 너무도 많고 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모든 게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았다. 나는 그냥, 어제 도착했다고 했다. 뉴욕이 이렇게 추운 줄 몰랐다고. 그는 당장 다음주가 개강인데 엊그제에야 JFK에 착륙했다는 대책 없는 학생을 처음 보았는지 놀란 눈치였고 내가 어디서 지내는지를 물었다. 어디서 누구와 지내는지, 뉴욕 생활을 안내해 줄 사람이 있는지, 새로운 환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문이 열리고 두서없이 영어가 쏟아져 나왔다. 가장 어려운 공인영어시험 중 하나인 토플을 7년간 가르쳐왔던 나인데, 한국에서 인터넷 강의도 했는데, 아주 똑똑하고 자신있는 사람인 것처럼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었는데 절망스러울 정도의 횡설수설이 시작되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하고 싶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내일밤이 지나면 나와 똑같이 달리 갈 데가 없는 개가 한마리 이 도시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지, 왜 미리 집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뉴욕을 택했는지에 대해. 

여기가 얼마나 추운지, 지금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지, 동시에 이 외로움과 무서움이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지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그 질문이 필요했다. how are you? 너 어때? 어떻게 지내? 무슨 일이 있어? 지나가는 인사이자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에 대한 심원한 물음이기도 한 것. 아마 나를 인터뷰한 그는 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질문을 많이 준비해왔을 텐데, 혹시 개에게 눈병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오늘 아침에 인터넷을 두 시간이나 검색했다는 한국 여자애의 중언부언을 들으려고 출근한 건 아니었을 텐데도 그는 내가 할 말을 다 하게 내버려 두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처음 모였던 큰 방에 돌아가자 중앙의 테이블을 두고 면접 시험관들이 둥그렇게 모여 무슨 얘기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당연히 면접 결과나 학생들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줄 알았다. 온갖 국적과 피부색과 언어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웅성거리기 시작할 정도로 그들은 무언가에 대해 길고 진지하게 토론하더니, 나를 불렀다. 우리는 모두 학교 부설 어학원의 선생님들이라고. 마침 이 중 한 명이 한국계 미국인이고, 한국 대학 교수의 딸이며 여동생과 함께 사는데 그 동생이 출장을 가서 천행으로 집에 방이 하나 남으니 집을 구할 때까지 거기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응낙했다. 천사가 나타났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었다. 대학원에 입학하러 왔으니 신원이야 서류가 증명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억만리에서 날아온 낯선 사람을, 그것도 개와 함께 재워주겠다니. 숫자와 방위 이름으로만 이루어져서 익숙해지려면 백년을 걸릴 것 같은 주소들 중에 내가 아는 주소가 생긴다니. 초인종을 누르면 열어주는 문이 생긴다니.


하지만 내가 가장 마음 깊이 안심했던 건, 내 말을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버려진 후 입양갈 데도 없는 황구를 기어이 미국에 데려왔든 말든, 멍청하게 미리 집도 안 구하고 뉴욕에 와 버렸든 말든, 영하 10도의 추위에 온갖 짐과 개를 끌고 에어비앤비를 전전하며 인터넷의 가짜 광고에 속든 말든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지루하지 않으면 부담스럽게 안쓰러운 얘기일 뿐이다. 


그러나 거기엔 질문이 있었고, 그래서 대답이 따랐고, 그들은 내 말을 믿어주었다. 내가 하는 얘기를 듣고 나의 처지를 헤아리려고 애썼으며 마침내 도움의 손길까지 내 주었다. 그리고 나는 NYU 어학원의 선생님이자 한국계 미국인인 유나의 집에서 지내며 믿을만한 공인중개사까지 소개받아 일주일 후에 방을 구했다.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나는 뉴욕에서의 그 첫 며칠을 자주 생각한다. 

유나의 집에서 지내면서도 방을 구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아서 하루종일 도시를 헤매다 동네 식당에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으면 직원이 물었다. How's it going? 어떻게 돼가요? 집을 구하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너무 비싸거나 위험한 동네에 있거나 멀어요, 라고 대답하면 그는 소스 종지에다 케첩으로 나비를 그려주었다. 윤기나는 케첩 나비가 집 구하는 데 보탬이 되진 않았지만 나는 점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지내요? 잘돼가요? 하루에도 수백 수천만 번씩 습관처럼, 대개는 허공에 흩어지고 간혹은 진짜 대화로 이어지는 그 인사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말을 걸어주었다. 그 질문이 있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거대하고 쌀쌀맞은 도시 뉴욕이 사랑하는 친구들의 도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한 인도계 미국인의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맞아 "가장 미국적인 경험"을 이민자 작가들이 릴레이로 써내는 꼭지였다. 유년기를 인도에서 다 보내고야 미국에 와서 작가가 된 카란 마하잔(Karan Mahajan)은, 이민 초기의 자신에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레스토랑이나 가게에서 스몰톡하는 경험이었다고 설명한다. 

인도에서는 물건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쓸데없이 미소짓는 가식을 떨지 않는다고. 대체 미국인들은 왜 주문 받으러 온 사람의 셔츠를 칭찬하거나 말을 걸어서는 간단한 화폐 교환 행위를 떠들썩한 사교행위로 만드냐는 요지의 불만을 가졌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작가는 자주 가는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와 편안하게 안부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별일 없어요, 그냥 책 읽으며 지내요, 라고 대답한다고. 매일 별 일이 없으면 매일 별 일이 없다고 답하는 것, 그 미국적인 일상이 이제 자기의 일부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는 글의 마지막에 인도의 한 소설을 인용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도의 청년이며 태어나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고 생던 처음 뉴욕에 오게 되는데, 퉁명스럽고 남 긴장시키기로 악명높은 JFK 공항 세관이 그의 여권을 받아들고는 의례적으로 그에게 어떻게 돼가냐고 묻는 대목이다.

'


JFK 공항에 도착해 세관 직원이 "어떻게 돼가요?(How's it going?)"이라 물었을 때, 고팔은 그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대답한다:


나는 그에게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문제거리와 또 갖고 있는 희망들을 전부,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했어. 이기적인 미국인이 우리 지역의 헤어 오일 가격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 신경이나 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형제여, 그는 10분 동안 내게 눈을 맞추고 아주 조용히 들어주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땅콩에 대한 다정한 얘기를 나누었고 그는 나에게 가도 좋다고 하더군.



나는 이 인도계 미국인에게 마음깊이 공감하면서, 세관에서의 땅콩에 관한 대화와 언어시험장에서의 개 눈병에 대한 대화를 생각하면서, 미소지으며 눈물지으며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