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외국어를 말하는 나는 한국어를 말하는 나와 다른 결정을 내린다

RomiT 2019. 3. 29. 16:19

한때 유명했던 사고실험이 있다. 둘로 갈라진 레일이 있고 한쪽 레일엔 열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일하는 노동자가, 다른 쪽 레일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꼼짝할 수 없게 묶여 있다. 내가 저만치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로를 변경하면 남자가 열차에 치어 죽겠지만 다섯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나는 레버를 당길 것인가?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한 명의 목숨은 다섯 명의 것보다 덜 소중한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레버를 당기지 않는다면 다섯 인간의 목숨에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트롤리 사고실험"으로 알려진 이 질문은 여러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심술궂기도 하고), 무인자동차에게 "토끼를 치고 더 큰 사고를 피할 것인지 토끼를 살리고 사고를 당할 것인지"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해야 할 때에는 우리의 현실과 생각보다 가까이 맞닿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심술맞은 데가 좀 있기도 하고, 일부러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는 데 있어서 내가 별로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고실험이 이중언어구사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을 때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2018년 코그니션Cognition지에 실린 이 실험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01002771730330X 에서는 800명의 영어/독일어 바이링구얼들에게 절반씩 각각 독어와 영어로 질문하고 대답하게 했다. 한 명을 선로에서 밀어 다섯 명을 구하겠다고 답하는 비율이 영어에서 더 높았다고 한다. 일견 놀라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발견은 아닌데, 이미 이전에도 한국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불어 등으로 진행된 실험에서도 윤리관이 바뀌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무거운 윤리적 질문에서뿐 아니라 다른 결의 질문에서도 외국어로는 모국어로 내렸던 결정과 판이한 결론을 내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데, 그것은 모국어가 우리의 감각과 인지력에 좀 더 직접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단어들이 감정적으로 우리와 얽혀 있고, 개인적인 기억을 불러내며, 주로 쓰던 언어습관의 트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외국어는 말 자체가 선명히 불러오는 색채나 트라우마가 현저히 적으며 때문에 사물을 한발짝 떨어져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 말이 아닌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는 확실히 그런 점이 있다. 어딘가 먼 나라에서는 바다를 이렇게 발음한대, 자동차는 이런 단어고 강아지는 이렇게 말한대, 귀에도 설고 혀에도 붙지 않는 단어를 복음처럼 열심히 따라외는 데서 오는 명징함. 이탈리아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손으로 키스를 한대, 활짝 웃으면서. 혹은 프랑스에서는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 다정하게 양 볼에 입맞춘대, 언제 나도 그런 이국적인 제스처를 따라해볼 기회를 갖게 될까? 미국에서 온 누군가와 주먹을 부딪히며 인사하는, 그런 쿨하고 쾌활한 사람이 될 수도 있을까? 하고 설레는. 

실제로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어를 할 때는 어쩐지 예의를 차리게 되고 사과를 자주 하게 된다고 했다. 한국어를 하고 있는 나와는 좀 다른 인격이 태어나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나에게는 영어가, 한국어로 이미 구성되어 버린 스스로를 재발명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샘표간장이나 아씨만두를 굳이 영어로 쓰고 로고를 다시 디자인하는 과정을 거쳐 리브랜딩하는 것처럼, 너무 많고 너무 익숙한 말에서 스스로를 구출해 나의 새로운 면을 꺼내 쓰기 시작하는 것은 때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신나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끔 멍청한 농담을 하고 술취한 사람처럼 굴더라도, 나이지만 약간 다른, 그러나 여전히 나인 스스로를 만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을 만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다. 

한 언어만 구사하는 나는 유식한 말을 잘하고 날카롭지만 매사에 흠집을 찾아내려는 것도 같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도 좀 기뿐 나쁠 정도로 즐거워하는 것 같다. 칭찬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다른 언어로 건너간 나는 보다 자유롭고 관대하다. 이거 해볼까? 하자! 저것도 해볼까? 하자! 오늘 날씨가 너무 아름답구나! 좋은 하루가 될거야! 한없이 대범하고 긍정적인 데에도 지치면 나는 원래 언어로 돌아온다. 그렇게 두 개의 언어는 나에게 새로운 균형을 찾게 한다. 

이거 어떡해? 내일은 어떡해? 남들은 이미 다 했다던데 너는 어떡해? 안될 것 같으니까 아예 하지 말까? 에너지도 아끼고 불필요한 실망거리를 없애자. 마음속에서 커지는 불안에 나는 남의 언어로 대답하곤 한다. 왜 안돼? 해보고 생각하자. 길이 있겠지. 자고 나면 다 괜찮아질거야. 지금은 잘 먹고, 잘 자고, 아침이 되면 그건 또 새로운 날일 거야. 그리고 나는 영어로 궁시렁거리며, 스스로의 궁둥이를 때려 나쁜 생각을 몰아내며 양치질을 한다. 일단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하나씩이라고 끝없이 되뇌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