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kibun과 feelings 두번째: 한국어의 배신

RomiT 2017. 10. 6. 18:51

이번 글은 최근 듣고 본 몇 가지의 일화로 시작하려 한다.

1. 트위터에서 리트윗되어 오는 낯 모를 이들의 일상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을 때가 자주 있는데, 얼마 전 노량진 수산시장을 방문해 바지락 반 근을 샀다가 점포의 주인에게 "그것밖에 안 사느냐"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그러했다.


책정된 가격을 지불하고 상품을 구매한 소비자에게 "너는 너무 적은 양을 샀으므로 내게 너무 적은 돈을 벌게 해 주었다"는 요지인 듯한(그렇지 않다면 발화 의도가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는) 말을 작별인사 대신 했다는 이 사람의 연령대가 대략 짐작될 정도로 나도 종종 겪는 언사이다.


2. 어린이를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한 아동이 불쑥 자기에게 찾아와 결혼을 했냐고 질문하기에 "아니(안 했어), 왜(물어보니)?" 라고 대답했더니 "그럴 것 같았어요." 라고 말했다는 것. 더이상 대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더니 올 때처럼 훌쩍 떠났다고 한다.


3. 내가 하는 강의에 참여하는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길을 가고 있는데, 50-60대로 추정되는 장노년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길래 쳐다보았더니 자기의 진로 바깥으로 "밀어내는" 중이었다고 한다. 음성으로 실례한다거나 잠시 비켜달라거나 하는 신호는 전혀 없었으며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였고, 심지어 비슷한 또래의 일행과 대화를 나누면서 팔만 뻗어 모르는 사람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그 모르는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이야기였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개 "모르는 사람"과 스몰톡 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상대방과 거리를 유지할 줄 모르고 무례한 질문이나 평가를 하는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자주 느끼는 것이다. 택시를 탈 때, 물건을 살 때, 낯선 이가 걸어오는 말에 친절하게 응답해 주었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 대한 외모 평가나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사생활에 대한 월권을 경험한 적이 적지 않다. 


이를 "일부 한국인들은 무례하고 쓸데없는 호기심이 많다."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한국어 상황에서의 스몰톡을 가능한 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만약 한국어가 그러한 소셜 상황에서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사람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본다면?


1의 상황을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나 경험을 토대로 재건해 본다면 이러하다. (재래시장이었던 점을 고려하여 판매자를 중장년의 한국어 사용자로 설정)


구매자: 안녕하세요.(혹은 인사 생략)

판매자: 뭐 찾아(요)?(greeting, 즉 영어의 hi, how are you?에 해당하는 신호 없이 바로 해당 만남의 목적으로 대화의 주제가 이동)

구매자: 바지락 반 근 주세요.

(거래가 성사됨)

판매자: 왜 이렇게 적게 사.(북미식 스몰토크에서 흔히 쓰이는 주제인 날씨 혹은 현재의 공통 관심사인 식재료에 대해 얘기하지 않고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러므로 발화에 대한 반응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위험한 언사)


여기서 한국어가 언제 어떻게 사라지는지, 혹은 제 기능을 않고 모른 척 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한국어 사용자들은 사람의 외양을 육안으로 보고 나이가 적은지 많은지(즉 나보다 위계가 높은지 낮은지 판단하기 위해)를 반드시 확인해 반말을 쓸지 존대말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때로는 greeting(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등) 자체도 상대가 위계가 낮다고 판단되는 경우 사라지거나 이상한 코멘트로 대체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품을 구매한 구매자를 떠나보내기 전에 한국어는 "완전히 망가져서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Thanks, have a good one.(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처럼 간단한 한 마디가 한국어의 복잡한 위계와 혼란스러운 신호와 만나면 가식적이거나 비굴한, "나의 하위 위계 선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인사를 할 수는 없고, 인간 대 인간이 만났다 헤어지는 사회적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기는 한 화자는 거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아무말을 꺼내오는 것이다. 자주 무례하고 불쾌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러 "상대의 외모나 정황에 기반한 평가들"이 주가 되는.

여기서 나는 한국어가 제 기능을 해야 할 때 책임을 내던지고 물러나 있는 것을 본다. 문화와 언어가 물샐 틈 없이 결합해 언중을 괴롭히고 있는 현장인지, 그저 그 사람이 불쾌한 사람인지 이제 나는 더욱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동시에 그도 한국어의 무책임함과 기능장애로 고통받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더욱 한국어를 "현대 한국어 언중의 기준으로 볼 때 번역어처럼"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반드시 한국어 외의 언어를 배우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질 때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적절한 거리재기를 하며 상대의 감정을 해치지 않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를(혹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