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영어로 이력서를 써보아야 하는 이유: "저 그냥 회사 다니는데 뭐라고 써요?"

RomiT 2018. 5. 29. 19:49

"탈조(선)"가 유행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조선, 즉 한반도를 탈출해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단순히 "지금 여기가 아닌 아무데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과도 다른 것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진지하게 여기 아닌 다른 땅에서의 삶을 계획하는 것 같다.

탈조하려면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직업이다. 또다른 중요한 요소인 언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낯선 곳에서 소속감을 주고 상호작용할 친구를 만들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기에 그렇다. 일자리를 구하려면 나를 소개해야 한다. 일하는 나를 소개하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이력서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영어 이력서를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다.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의 이력을 돌아보면 영어로 자기소개를 다시 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내 수업의 청중들은 대다수가 젊은 한국 여성들인데, 영어 이력서를 쓰는 시간에 "나의 직무를 모두 적어보라"고 하면 우선 첫번째로는 한자 개념어로 가득한 업무를 영어로 바꾸기 힘들어서, 두번째로는 "내가 이만큼 많은 일을 했다/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일이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선뜻 적어내려가지 못하고 고전한다. 나는 여기서 두번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 직업의 이름(잡 타이틀)을 영어로 적고 나면 본격적으로 "뭘 했는지" 동사로 묘사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한 사람에게 하도 여러 직무를 떠맡기다 보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떠올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무를 설명해보라 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너무 잡다해서" 술술 말하기 힘들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잡다한 일을 한다"의 "잡다"를 버려야 한다. 영어로 번역할 수 없으며 다재다능한 나에게 일종의 경멸을 실어주는 말이다.  "I do a lot of different things.(나는 많은, 서로 다른 성격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이력서 쓸 준비는 시작된다.

잡 타이틀은 "경영지원"인데 상품출시 이벤트 *뒤치다꺼리*도 하고, 미팅 *수발*도 들며, 웹페이지 *구색도 맞추어* 놓는다. 언어가 내 직무를 하찮게 만든다. 이걸 모두 제대로 된 동사로 바꾸어 자기 이름을 찾아주어야 한다. 이벤트 뒤치다꺼리가 뭐냐고 물어보면 이벤트 당첨된 사람에게 연락하여 당첨내역을 알려주고 경품이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등의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communicate with customers(고객과 소통한다)"부터 "monitor & manage customer rewards system(고객 보상 프로그램의 감시와 관리)"까지 담당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학생은 회사에 따라 자신의 직무가 약간씩 달라지는데, 굵직한 것만 말해주겠다면서 설계나 디자인에 대해 언급하던 도중 "전화 돌려서 가격 뽑아내는" 얘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하기에 "그거 건축사들이랑 가격 협상(negotiate price with builders)"하는 거 아니에요? 라기에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라고 남의 일처럼 말한다. 그냥 소통도 아닌, 업체들과의 가격 협상이라는 고급 기술이 이렇게 이력서에서 홀랑 빠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어의 직무는 "사무직"이고 "행정직"이며 뭔가 "관리"하고 "지원"하는 이름들이어서 내가 구체적으로 뭘 얼마나 하는지, 여기 아닌 다른 체계에서라면 3명이 할 일을 나에게 시키는비 10명이 할 일을 나에게 시키는지, 나는 원래 이메일을 쓰고 전화를 걸어서 의사소통하는 게 주업무인데 어쩐지 숫자도 다루고 다른 직원 교육도 시키고 있지만 이게 내 기술인지 이력인지 아니면 그냥 잡일을 한건지 알 수 없게 한다. 이 모든 직무를 분리해서 남을 주거나 돈을 따로 받을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이 일을을 모두 "하고 있는" 사람이며 "여기에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영어 이력서를 쓰는 일이 그걸 도와줄 것이다.

영어 이력서를 당장 쓰지 않아도 괜찮다. "잡무"를 하나하나 분리해서 기억하고 기록하기만 해도 "탈조해도 먹고 살" 기술들이 하나 둘 늘어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