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찌검”이 들어오는 자리, 나를 속이는 언어 알아보기
어릴 적 학원에 다녀와 숙제까지 마치고 운이 좋으면 거실에서 TV 보는 엄마 아빠 틈에 슬며시 끼어들어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하나가 배우 김희선이 극중 남자친구와 말싸움을 하다 뺨을 맞는 장면이었는데, 갑작스런 폭력에 놀란 그가 "너무 아파 민기야, 너무 아파."라며 주저앉아 울자 뺨을 때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던 남자친구가 할 수 없다는 듯 안아 달래는 내용이었다. 윤기나는 검은 긴머리를 머리띠로 곱게 쓸어넘기고 천사같은 원피스를 입은 예쁜 배우가 난데없이 뺨을 맞는 것 때문이었는지 여자친구에게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해 놓고도 씩씩거리던 남자 때문이었는지 여자의 뺨을 때리는 행위가 싸움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하는 한 도구로 묘사된 것 같은 연출 때문이었는지 아주 옛날 드마라인데도 "너무 아파 민기야"라는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손찌검은 이상한 단어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뜻인데 어디를 얼마만큼 때리는지, 맞은 사람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안개처럼 흐려놓는다. 손으로 때린 것은 알겠는데 몇 번이나 가격했는지는 모른다. 손 모양이 쫙 편, 따귀 치는 모양이었는지 주먹이었는지 백핸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냥 내가 어린 시절 본 드라마에서 김희선이 남자친구에게 맞은 것처럼, 어쩌다보니 손과 신체가 접촉했고 짝 소리 정도는 났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행위자와 당하는 사람간의 위계 차이도 존재한다. 손찌검을 온라인 검색해보면 "사장이 욕설을 퍼붓고 손찌검을 했다" 혹은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문장이 자주 보이는데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을 때린 경우나 모르는 사람을 때린 경우는 손찌검이라는 단어를 덜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감정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일수록 손찌검이 된다. 상대를 쉽게 한 대 때릴 수 있는 권력이나 신체적 우위를 가졌을수록, 그 격차가 벌어질수록 손찌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30대 남자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9세 아동 세 명을 폭행한 사건을 인터넷 기사로 읽은 일이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이 다른 아동에게 맞고 있다고 오해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을 때렸다고 증언했는데,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A씨는 B군을 폭행했다. (...) 여학생들에게도 손찌검을 했다."는 대목이었다. 자기 아들이 맞고 있다고 생각해서 아들에게 장난치고 있었던 남아 B군을 "폭행했고", 이에 겁을 먹은 B군이 옆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전혀 모르는 사이인 여아 두 명을 손으로 가리키자 그들에게는 "손찌검을 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여자 아동들이 도망치자 이들을 다시 데려와(데려왔을 리가 없다. 끌고 왔다고 쓰지 않고 데려왔다는 단어를 선택한 것도 문제가 있다) 폭행했다고 정황 설명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이 성인 남성이 왜 9세 아동들을, 특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여아들을 때려야 했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완충단어로 손찌검을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했다.
아이들을 때린 남자가 애초에 손찌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증인이 있었는지, 기자가 선택한 단어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같은 나이의 아동들이 성인 남자에게 맞았는데 한 쪽은 폭행을 당했다고 묘사되고 한쪽은 손찌검을 당했다고 묘사될 때 무엇이 다른지를 궁금해봐야 하지 않을까?
누가 나를 손바닥과 주먹을 동원해 머리 등을 수회 가격했다고 상상해 보자. 나를 때린 자가 나에게 "전치 3주의 병원치료를 요하며 정신적 트라우마를 남긴 폭행을 당신에게 가한 것을 사과한다"고 하는 것과 "손찌검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같은 무게일까?
배우자의 결혼 외 정사(extramarital affair)로 인한 심정적 고통(emotional pain)을 겪었다고 말하는 것과 "바람기 때문에 속을 썩었다"고 말하는 것 중 어떤 언어가 더 외부 충격을 흡수해서 화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을까? 혹은 실제 있었던 일에 접근하기까지 더 많은 추가 질문이 필요할까? 아니면, 기만적일까?
언어는 실제로 있었던 일과 나 사이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내가 자주 접하는 언어가 폭행 대신 손찌검을 자꾸 쥐어준다면 내가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문장에서 손찌검이 들어오는 자리는 내게 천막으로 가려놓은 웅덩이 같다. 누가 왜 가려놨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래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발을 디딜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