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바이링구얼리즘: 이중언어의 그늘 아래 서기

RomiT 2018. 8. 15. 14:40

나는 숫자에 매우 약하다. 새로 이사한 집 주소를 외우는 데 한 달은 족히 걸렸는데도 아직도 행정구역 다음의 숫자를 불러줄 때가 되면 스스로가 못 미더워 맥도날드 배달 서비스 앱에 입력해둔 주소를 자꾸 확인한다. 방향감각도 엉망이다.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길을 찾기 때문에 공원이나 스타벅스가 없어지면 큰일이다. 거의 평생을 살았던 동네인 합정역 전철역사 안에서 마음먹은 대로 출구를 골라서 찾아 나오게 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여태 생존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본적인 감각을 결핍한 나이지만, 이를 보상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살 자리인지 못 살 자리인지를 언어로 알아보는 능력이다. 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혹은 내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지를 살피고 혹시 모를 오해와 소통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는, 내가 알아듣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인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감"이다. 다른 이들의 말투를 지적하거나 어휘를 평가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안에 불행의 씨앗이 있지 않은지 보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견딜 수 없는 종류의.

우리는 인생의 시작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시작한다. 내가 가족을 아끼는 것과 별개로, 초중고 시절의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이것은 사실이다. 나이를 먹으며 우리는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돌하고, 조정하고, 타협하고, 배우며 각자의 언어를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다. 누구나 자기가 편안하게 느끼는 말의 군락이 따로 있다. 그리고 거기부터 서로를 선택하는 말의 여정이 시작된다. 서로를 알아보고 선택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온전히 나의 책임이며, 시행착오는 가끔 회복이 아주 오래 걸리는 상처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공적인 선택들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들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 못한 말들과 혼란한 감정들이 쌓이기 전에, 혹은 쌓인 후에라도 우리가 이해하는 말로 중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귀한 관계들을.

누군가 쓰는 말로만 그의 본모습을 전부 알아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늪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방법을 찾는 수밖에는 없다. 내 시시한 농담에 웃어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해주었던 사람들, 이제 끝장이라는 선명한 감각조차 사치일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내 장황하고 자신없는 설명을 듣고도 나를 재워주고 내 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덕에 나는 아주 멀리까지 갔다 왔고, 잘 지냈을 뿐 아니라 번영했고, 내가 누군지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길 찾는 능력과 주소 기억하는 능력을 대신하는, 말 찾아가는 능력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조차 신호이다. 세상에 가득한, 명멸하는 신호 가운데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내 등대로 삼았다. 모국어에 말 하나를 더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세상이 그렇게까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명사가 얼마든지 있는 문장을 영어로 신나게 적어 내려가며 내 언어를 찾았다고 느꼈고, 동시에 "꼭 연락드릴게요."보다는 "별표 쳐놓을게요!"가 더 좋은 한국어일 때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이링구얼리즘은 내가 무얼 보고 있는지를 판별해주는 렌즈이자 너무 따가운 모국어로부터 나를 숨겨주는 양산이기도 했다. 

그저 "영어라는 국제어를 하기 때문에 얻는 이득"과도 다르다. 영어를 하는 나는 한국어를 하는 내가 보지 못하는 신나는 가능성과 미세한 감정의 눈금들을 본다. 한국어를 하는 나는 영어를 하는 내가 피하지 못했을 함정을 찾아내고 목적지까지의 지름길을 도출한다. 

말을 배우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절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스트레스가 되는 일일 수도 있고 시간과 노력이, 때로는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어디가 완결인지도 모르겠고 이유 모를 수치심과 자괴감이 가끔 벼락같이 나를 찾아온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세상은 아직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호로 가득하다. 어디가 내 자리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여전히 영원한 수수께끼이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중언어가 나와 세상과의 대치상태에 비로소 납득할 만한 평화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정감은 내가 스스로에게 해준 것들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바이링구얼리즘이 다음 신호를 알아볼 새 안경이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