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개가 참 예쁘네요, 나 어제 개소주 먹었는데." 스몰톡이 길을 잃었을 때

RomiT 2018. 10. 1. 10:59

나는 개를 기르는 1인 가정이다. 지금은 내 개인 골든두들 한 마리에, 가족을 찾을 때까지 임시보호중인 푸들까지 당분간 두 마리를 돌보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개를 키우는 것도 그렇다. 인간과 건강한 상호작용을 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개를 산책시킬 때 우호적으로 반응하며 개에게 인사하거나 개를 봤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사람들 덕에 내가 개와 함께 사는 일이 나날이 조금씩 쉬워진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 비해 개를 보고 갑자기 도망을 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훨씬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와 거리를 나선다는 것, 모르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러 개 근처까지 다가와 발을 구르고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고 휘파람을 불거나 큰 소리로 우쭈쭈를 하면서 이를테면 성희롱을 하는 경우도 아직 꽤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것은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친근한 사람들"이다. 한국어의 스몰톡이 개라는 주제를 만나면 더욱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릴 넘치는 야생의 대화가 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한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산책 중 동네의 아는 개와 그 견주들을 만나 잠시 쉬면서 대화하는 중이었는데, 술에 취한 듯한 남성이 다가와서 개가 예쁘다고 어르기 시작했다. 그는 개의 종류가 뭐냐고 묻고는 자기도 어렸을 때 개를 키웠다는 등 평범하고도 친근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기어코 그 한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개들이 참 좋아. 근데 나 어제 개소주 먹었는데."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견주들과, 개들을 예뻐해주고 있던 다른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었다. 그는 자기 실수를 깨달았는지 한입 먹고 물렸다는 둥, 미안하다는 둥 횡설수설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은 후였다. 

한번은 아침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다짜고짜 "난 한 마리도 힘든데 어떻게 두 마리를 키워?"라는 말을 던졌다. 내가 아무말 않자 "근데 쟤(두마리 중 하나)는 하얗고 이쁘네."라더니 가 버렸다.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걸기에 "동물"은 참 좋은 매개가 된다. 인간만 가득한 거리에 나타난 낯선 네발 생물은 경외나 찬탄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심상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말을 거는 핑계가 무엇이 되었든, 순수한 친교 목적의 스몰톡은 나쁠 게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개가 예쁘네요."로 끝나지 못하고 "개 개 개자로 시작하는 말은 개소주!" 식의 무시무시한 반전을 맞이하는 스몰톡은 대화가 아니다. 일방적인 폭력이자 나 스스로의 인격을 감점시키는 불필요한 자기고백이다. 포근해 보이는 털가죽에 양 옆으로 살랑거리는 꼬리, 포도알같은 까만 두 눈동자를 보고 홀리듯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면 "개가 예쁘다"라 말하고 거기서 멈출 수 있었어야 한다. 혹은 개를 핑계로 견주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면 갑자기 까만 봉지에 싼 조개젓을 내미는 대신 "날씨가 좋네요. 어제는 비가 왔는데."라고 말했어야 한다. 애초에 개소주 운운하며 나와 개들에게 다가왔다면 소리를 질러 위협해서 쫓아냈겠지만 나는 이미 웃으며 그와 대화하던 중이었다. 이렇게 곤란할 수는 없다. 


산책길에 나선 타인의 개를 보고 내 개에 대한 이야기와 개와 함께 산다는 것의 고충이 떠올라 말을 걸고 싶어졌다면, "안녕하세요, 개들이 예쁘네요. 나도 개를 키워요. 이름은 동식이고 말티즈에요."라고 시작했어야 한다. 방백처럼 내뱉는 감상과 판단은 대화하자는 신호가 될 수 없다. 


어제도 오늘도 개를 산책시키러 횡단보도에 섰다. 건너편에서 비명을 지르는 아동들을 본다. 그들이 언젠가 모르는 동물을 마주쳐도 심상히 지나갈 수 있는 성인이 될 거라 생각한다. 저 중 누군가는 나중에 개나 고양이를 기르게 되겠지. 내 개들은 괜찮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웃으며 다가와 툭툭 뱉는, 허공에 사라지는 이상한 소리는 나를 종일 질문하게 한다. 저런 대화를 시작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저런 식으로 말을 걸어놓고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혹은 한국어가 닦아놓은 길이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식에 있어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분명 처음에는 그저 말을 걸고 싶었을 뿐일 텐데, 개들이 처음 만나 서로 냄새를 맡듯이. 나는 내 냄새를 맡으라고 그들을 믿고 엉덩이를 내주었는데 갑자기 물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