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영어

"개 물어요?"가 이상한 질문인 이유

RomiT 2018. 10. 25. 15:45

개와 산책을 나가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개도 기뻐하고, 나도 바깥 공기를 쬐며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출근하느라 허덕이는 게 아닌, 혹은 퇴근하면서 하루 일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게 아닌 일부러 짬을 내서 하는 산책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집 앞 교차로의 큰 가로수들에 걸린 햇살이 얼마나 몽롱하고 예쁜지, 개들을 데리고가 아니면 입구도 들어가보지 않았을 낮은 뒷산에서 얼마나 좋은 풀내음이 나는지를 천천히 깨닫는 일은 하루치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기에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가끔 불쾌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뜸 다가와 "개 물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샌드위치를 사느라 개 두 마리를 가게 앞에 묶어두고 기다리게 한 후 나왔는데, 개들을 풀어주고 있는 내 뒤에서 어떤 중년 남성이 다짜고짜 "물어요?"라고 질문했다. 나는 "물어요."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러자 그는 "무는 개면 줄이 너무 긴데."라고 내 뒤에 큰 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돌아섰다. 아마 개를 만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지 않는다"는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샌드위치 가게 밖에서 인내심 있게 앉아있는 개들을 보고 일부러 다가왔으니까.

나는 "물지 않지만 훈련 중이니까 만지지 마세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개를 만지고 싶은데 무는 개인가요?"라고 묻지 않았다. 그냥 다짜고짜 빈 공간에 얌전히 있는 개와 그 동반인에게 와서 "당신의 개는 사람을 공격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 두 질문을 분리해서 "개를 만져도 되나요Can I pet your dog?"부터 물었으면 나는 그냥 간단하게 "안 됩니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아마 거기에 더해 "산책 연습 중이니까 만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라고 덧붙여 주었을 것이다. 물지도 않는 개를 문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의 훈련이나 양육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도 계속 배우는 중이고, 전문가도 아니다. 그저 나보다 잘 아는 사람들을 보고 계속 공부할 뿐이다. 다만 인간이 인간에게 말을 걸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으나 상대가 알아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하는 말"은 참을 수 없을 뿐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길 기대하고 인사도 없이 "당신의 개는 무는 개이냐"고 묻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차라리 "개가 귀여워서 만지고 싶어요."라고 했으면 내가 다음 방법을 강구해 주었을 것이다. 빨리 가서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만 시간을 들여 개와 인사하게 해 주었을 수도 있다. 그는 무언가 말했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질문이었고, 그건 그와 나와의 의사소통을 방해했다. 내가 이렇게 앉아 글을 쓰게 될 정도로.

이런 일이 반복되고, 나처럼 생각하고 반응하는 개 보호자들이 늘어나면 더이상 "정말 무는 개인지" 질문하는 일이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보다는 표정이나 말투를 보고 진짜 의도를 짐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상호 소통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내가 아무렇게나 말해도 상대가 알아듣겠지, 혹은 더 나아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나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이상한 생략들, 혹은 돌려 말하다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는 일이 한국어에는 꽤 많이 존재한다.

 배우자에게 "내일 어머니의 생신을 함께 축하하려고 하는데 네가 할 일이 굉장히 많을 것 같아. 그걸 요청해도 될까?"를 말하려는데 "내일 어머니 생신인 거 알지?" 한마디로 끝낼 수는 없다. 대화에 엄청난 혼선이 생기거나 불쾌한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물론 상대에게 수락도 거절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매우 나쁜 습관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신의 언어습관을 반성하기는커녕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냐"며 상대를 비난하게까지 되는 일도 흔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자신도 잊었기 때문이다. 최소한만 말해놓고 상대가 알아들으면 좋고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아들을 때까지 몰아가는 식으로 소통을 경색시키는 일이 자기 언어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개떡같이 말하고 찰떡같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 찰떡같이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한 다음 물어보면 된다. 지금 이 발화를 시작하려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일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