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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언어: "죄송한데 방금 하신 말씀이 이해가 잘 안되어서요..."

RomiT 2017. 10. 27. 16:28

질문하기.


한국어만으로 살 때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으며 때로는 나를 "이상한 아이"로 만들어 무리에서 겉돌게 하는 가장 큰 챕터 중 하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았다. 피아노 선생님이 내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면 악보 구석구석의 모르는 나라 말이 무슨 뜻인지 일일이 물어봐서 당황스러웠다고 웃으며 엄마에게 전하곤 했다. 

모든 아이들에게 그렇듯 세상은 내게 암호였다. 온통 물어볼 것 투성이였다. 학교 선생님들은 질문을 잘 받아주거나 나를 "명석한 아이"라고 추켜세워 주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몹시 화를 내거나 못 들은 척하기도 했다.

내 질문에 당황하거나 심기가 불편해지고, 혹은 화를 내는 사람들을 겪으며 내 질문은 줄어들었다. 물어봐도 얻는 게 없었다. 상대를 언짢게 할 뿐인 일이 너무 잦았다.


왜 물어보지 못하는 걸까? 질문을 한다 해도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돌려 말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알고 싶은 것 뿐인데.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면서 질문은 한결 편해지고 가벼워졌다. 나는 좀 살 것 같았다. 정말이지 숨통이 트였다. 질문하는 나를 영어는 미워하지 않았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해 주었다. "질문하면 답하는 언어", 내가 여태 필요했던 것은 이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한국어는 고맥락인 해당 문화(high-context culture)를 아주 잘 반영하는 언어이다. 고맥락 문화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메시지 전달보다, 암시적이며 때로는 숨겨져 있는 신호로 소통하는 문화를 말한다.


중국과 일본 역시 이런 고맥락 문화권에 속하며, 독일과 스위스는 정반대로 맥락에 의존하지 않고 소통하는 대표적인 문화권이다. 미국 영어는 영국 영어보다도 맥락에 덜 의존하는, 저맥락 문화권의 언어로 분류된다. 

이렇게 문화와 언어는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고맥락 사회의 경우 "내가 대충 말해도 알아서 알아들어 주거나 심지어 말하지 않아도 메시지가 전달되길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 화자나 청자가 알아듣지 못해도 언어는 사정 봐주지 않는다. 


한국어와 영어의 질문을 비교해보자.

강연이나 수업을 듣는데(즉 상대방이 권위가 있다고 여겨질 때) 방금 화자의 말이 이해가 안되어 질문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당신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 or 부연설명을 원한다"는 질문을 하고 싶어할 때,


미국 영어는 

"What does it mean?" 혹은 "What do you mean?"

이면 충분하다. 

상황에 따라 

"What is that supposed to mean?(그래서 하려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 "I don't follow.(나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So?(그래서?)"

등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어쨌든 질문은 간단하다.


한국어로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라는 간단한 질문조차 시비조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방금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도 물어보기 힘들다. 그리고 너무 길다. 질문받은 사람은 이상한 뉘앙스를 감지한다. 

"그래서요?"는 싸우자는 말이고,

"의미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도 이상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는 질문받은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

내가 구어로 한국어 질문을 잘 하려면 "방금 하신 말씀이 이해가 잘 안되어서 그런데 죄송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도로 쓸데없는 메시지를 많이 추가한다. 사실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는 부분은 문제가 아닌 경우에도 저렇게 물어본다. "음 잘 이해가 안됩니다."라고만 말하면 화자는 당혹스러워 하고 청중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이렇듯 내가 한국어 질문을 할 때면 어떻게 하면 질문 받는 사람이 kibun 상하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거나 아예 질문의 핵심이 비껴가 버리는 일이 잦았다. 


어째서 한국어 질문이 이렇게 하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힘든지는 아직 계속 생각하고 있다. 단순히 고맥락 사회여서 그렇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구사하는 다른 언어로는 훨씬 쉬운데 한국어로는 매번 힘들다" 뿐이다. 사실 질문은 원래 긴장을 동반하는 발화이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더 집중한다. 미국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에너지 소비를 한국어와 비교했을 때 영어는 매우 미미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생활하면서도 속으로는 영어로 질문하곤 한다. "So what is the definition of it? What is she trying to say? WHAT DOES IT MEAN?(그래서 저 개념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저건 어떤 의미일까?)"

실제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나도 한국어의 "분위기를 읽는 기술"이 아주 형편없지는 않지 때문에 매번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매우 다르다. "물어봤자 손해기 때문에" 질문이 없어지다시피 한 언어만을 구사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질문이 자유로운 언어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매우, 매우 다르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가 질문하는 길을 발견할 때까지 영어를 질문의 언어로 갖기를 권한다. 답은 스스로 해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