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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그냥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는 것뿐 아니라 분명히 내게로 향하는 냉소적인 빈정거림이나 예의상 하는 말도 잘 구분하지 못해서 멍하니 홀로 남겨지는 일이 잦았다.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으면 하도 옆에서 말을 걸고 귀찮게 굴어서 그 친구가 마침내 치를 떨고 주변에 나의 악행을 고발할 때까지 쫓아다녔고, 나에게 친절한 어른이 "나중에 이모 집에 또 놀러 와."라고 하면 언제 또 놀러가는지를 엄마에게 묻고 또 물어 결국 호통을 듣곤 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한강에 놀러 갔다가 밤낚시에 푹 빠진 아빠를 남겨두고 엄마 손을 잡고 돌아오는데, 엄마가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당시 채 개발되지 않아 진흙뻘 투성이에 억새가 내 키만큼 자란 그 길은 엄마와 함께 있어도 무서웠는데, 달이 밝은 것조차 불길하게 느껴졌다. 짧은 내 다리로 아무리 걸어도 아는 길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엄마, 우리 어디 가?"라고 묻자 지름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었을 뿐인 엄마는 "너희 버리러 간다."고, 물론 장난으로 말했고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집에 오는 내내 울었다. 반면 한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남동생은 엄마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미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었던 것 아닐까. 이제 어딘가 버려질 줄 알았는데 집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충격이 가시질 않아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소파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었었다. 

눈치라는 것은 너무 많은 사회적 기술을 포괄하는 개념이어서, 이제 사회화를 막 시작한 어린이에게는 버거운 주제였다. 모두가 조용히 하고 있을 때 나도 조용히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최선을 다해 쥐죽은 듯 있는 게 좋은 건지 조금씩 소리를 내도 좋은 건지 머리가 터져라 고민했다. 그러나 조용히 하는 게 항상 정답은 아니었는지 좀 크고 나서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냐"는 꾸짖음을 듣기도 했다. 아무래도 남들이 하는 대로 다 따라하는 걸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았다. 언제 조용히 있어야 하고 언제 남들보다 앞서 이상함을 감지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똑똑한 아이가 되어야 하는지가 그 다음 고민이 되었다. 아무때나 모순을 지적했다가는 어른들에게 큰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건 가끔 지나치게 알랑거리며 아부하는 일이었고, 때로는 똘똘하게 처세하는 기술이었다.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어선 안되는 거였다. 모든 신호에는 암호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그 암호를 초단위로 풀어내려 애쓰는 과정이었다. 날 속이려는 건 아니지만 진실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는 안 보고픈 것도 아니며, 순간순간 불쑥 드는 감정을 남들에게 서둘러 덤핑처리하듯 떠넘기는 데 쓰이는 말들, 말들, 말들. 

특히 대학교 때 까닭 없이 슬프고 세상에 혼자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날은 보통 눈치가 발동하지 않은 날이었다. 롯데월드를 가자고 누가 제안해서 그래 그럼 빨리 가자고 들떠서 서둘렀는데 사실은 아무도 정말 가고 싶어하지 않아했다든가, "너는 패셔니스타잖아"라고 칭찬해줘서 기뻐했는데 말해놓고 몇 명이서 깔깔 웃는 걸 보니 여럿이 나를 놀리는 거였다든가 하는 일들. 시간이 지나며 나도 내가 속한 그룹의 암묵적인 룰을 익혔고, 섣불리 질문하거나 말을 꺼내지 않는 법을 익혔고, 누군가 "나대면" 속으로 안도하며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눈치도 없이 나서긴, 아직 어른이 덜 됐구나, 나처럼 상황을 관망했어야지, 하면서. 하지만 역시 흉내만 내는 것으로는 눈치 마스터가 될 수 없었다. 눈치라는 것은 그 커뮤니티의 최고 권력자가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해서, 내가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항상 주변을 탐색하고 은근한 신호를 읽고 없는 말을 들어야 했다. 기싸움이라는 걸 해야 한다고도 했다. 내 영역에 들어오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너는 내 아래일 뿐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은근한 멸시와 경계를 말 끝마다 꼭 얹어야 한다고. 그리고 상대가 나에게 같은 방식의 밀어내기를 시도하면 반드시 알아보고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알아야 할 것들은 끝없이 많고 내가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 적었다. 가족들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걔가 그런 말을 했어? 너 무시하는 거잖아. 그걸 듣고 가만히 있었어? 듣고 보면 내가 파르르 떨며 분노해야 할 사안인 것도 같았다. 그러고보니 요즘 눈치가 이상하긴 했었다. 이걸 어떻게 갚아주지. 언제 뭐라고 한마디로 칼날같이 쏘아주어야 시원한 복수가 될까. 지가 뭔데 나를 우습게 봐.

하지만 어설픈 자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교본도 믿을 만한 선생도 없었다. 나는 그래서는 안될 때 너무 큰 소리로 화를 냈고 답답하면 솔직히 얘기하자며 사람들을 마구 불러내서 도망가게 만들었다. 적당히 빈정거리고 치고 빠지고 후일을 기약할 줄을 모르는, 타고나길 고장난 수레였다. 그래서 나는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를 잘 읽는 사람을 항상 부러워했다. 다리를 뻗을 자리인지 아닌지 척 보면 알고, 누가 자기에게 우호적인지 사실은 비밀스럽게 미워하고 있는지 척척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을 친구로 얻으면 편안하고 자신감이 생겼다. 세상의 어디가 늪이고 숲인지, 어느 자리를 골라 디뎌야 할지 의젓하게 알려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자기가 눈치가 빨라 괴롭다고 했다. 누가 "밑밥을 깔면"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 뻔히 예상이 되는데 거기 장단을 맞추어 줌으로써 존중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슬쩍슬쩍 건드는 걸 전부 알아봐 주는 것 역시 그 장단에 맞춰주는 일이라는 거였다. 

한국어는 고맥락 문화권의 언어다. 단 한마디를 하려고 해도, 예스인지 노인지만을 대답하려 해도 "예"인지 "응"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그러니까 나이를 물어봐야 한다), 학생인지 사모님인지, 아저씨인지 사장님인지, 나랑 친한지 안 친한지, 지금 내가 아쉬운 입장인 건지 건지 상대가 부탁하는 상황인 건지를 순식간에 계산하고 판단해서 "주십시오"인지 "줘봐요"인지가 갈린다. 조금이나마 눈치가 없으면 아예 능숙하게 구사하기가 힘든 언어다. 눈치라는 단어는 영어 위키피디아에도 등재되어 있다. "타인의 기분을 들어주고 읽어주는 미묘한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설명을 보면 한국인들의 높은 사회적 민감성(high social sensibility)로 정의되는 능력이며 조화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남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눈치 있다는 것은 상황파악이 빠르다는 평가인 동시에 상식이 있다는 말이고, 눈치 없다는 것은 맥락을 못 읽는 것부터 몰상식한 것까지를 망라한다고도 적혀 있다. 

언어와 문화는 서로를 파고들며 꼭 붙어 함께 진화한다. 말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까지 샅샅이 살펴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고도로 맥락화된 언어가 한국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큰 뉘앙스의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어느 여름날 축구경기를 보면서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친구와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마시며 시선으로 공을 좇고 있었는데,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니야"와 "아니거든"의 차이가 뭐냐고.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마시던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차이가 있긴 무슨 차이가 있어? 뭐 이런 걸 물어봐? 몇분간 입을 벌리고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친구에게 그 둘의 차이가 누구와의 관계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인 건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여자친구가 "아니야"와 "아니라고"를 말할 때 뭔가 태도가 다른데 그게 뭔지 자기는 알아낼 수가 없다고 했다. 오케이,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구나. 그러면 그런 관계에서의 "아니야" 는 좀 더 순순히 no를 말하는 방식인가? 그러면 "아니라고"는 기분 나쁜 no겠지? 잠깐, "아니야"보다도 더 심상한 대답인 "아니"가 있지 않나? 굳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보다는 뉘앙스가 강한 거 아닌가? 그럼 대체 나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한참 축구도 못 보고 두뇌를 풀가동하던 나는 하프타임이 시작할 즈음에야 간신히 "아니야"는 단순한 no, "아니거든"은 네가 지금 여자친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일 가능성이 있는 대답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답을 해놓고 보니 더 큰 혼란이 남아 있었다. 둘 다 똑같은 no인데 하나는 그냥 no이고 하나는 경고를 담은 no라고? 그러면 그걸 설명한 나는 그 둘의 차이를 인식하고 사용해 왔던가? 나는 "아니라고"를 매번 상대를 언어적으로 약간 밀어내는 용도로 사용해 왔으며 또 나에게 "아니라고."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얘가 지금 나 신경 긁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구나"라고 이해했던 걸까? 어느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이것들을 우리는 모두 그냥 사회적으로 배워서 암묵적으로 합의해 조화롭게 소통하고 있는 걸까?

"편하시게 골라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사하실 때 가구 보시러 다니시는 것도 고역이시잖아요"라는 글도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다. 존대어가 붙을 수 있는 곳마다 다 존대가 붙어 있었다. 그냥 "편하게 골라주세요"는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문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사할 때 가구 보러 다니는 것도 고역이잖아요"는 상대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또 언어와 문화가 결합해서 눈금이 옮겨가는 중인 것이다. 말의 가능한 모든 부분에 존칭어미를 붙여 상대가 자기를 높이지 않는다는 오해를 1초라도 하지 않도록.  문장이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고 나는 얼마나 완벽하게 상대의 모든 기척을 떠받들 수 있을까. 한마디 한마디가 스피킹 테스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21세기도 4차 산업혁명도 진보를 그냥 가져오진 않는다. 위계 낮은 자가 위계 높은 자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피는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바람직해지는 문화에서는 존중을 나타내는 표지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진 언어가 뒤를 따르는 것이다. 언어가 문화에 반응하는 속도는 매우 신속하고 방향은 정확하다. 남들이 최선을 다해 존칭어미를 사용하는 동안 나만 저항하는 마음으로 직상상사에게, 혹은 고객에게 짧은 문장을 말할 수는 없다. 모두가 의식적으로 흔들어 떨쳐내지 않으면 낮은 위계의 사람들은 중얼중얼 상소하듯 읊는 긴 문장을 만들어내다 소중한 인생을 수백 시간 낭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어로 나와 상대의 거리를 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한 형태의 말하기인가를 생각해보면 한편 감탄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생각하면 피곤하고 여러모로 쓸데가 없다.

 

눈치 없는 남을 보며 답답해하고, 또 혹시 내가 남에게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삶. 말의 행간을 읽고 또 읽고, 상대의 표정을 슬쩍슬쩍 살피고, 때로는 하지 않는 말까지 읽어야 하는 "눈치의 기술"을 연마하는 일은 피곤하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눈치 안봐도 되는" 건 좋은 거고 "눈치껏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은 한숨과 피로를 동반한다. 

한국의 국적기 항공사들은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그저 예의를 지키고 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불편한 눈치"를 주면 "알아서" 해결해 준다. 일본의 고급 료칸에서는 손님이 산책이나 나갈까 생각만 해도 방 밖에 신발을 가지런히 가져다 둔다고 한다. 나의 눈치를 빠르게, 크게 들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편안하다.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가 마냥 억압이고 폭력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분위기를 잘 읽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능이 높고 협동적인 인간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눈치가 너무 많은 지시사항을 생략하는 준엄한 백지이고 우리가 거기에 뭐라고 적어야 하는 수험생일 때에 할 수 있는 것은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원래 프랑스어의 vous는 상대의 사회적 지위와 나이에 존중을 담아 부르는 표현으로, 지금보다 훨씬 자주 쓰였다고 한다. "귀하" 혹은 "선생님"으로 번역되며 비즈니스 상황에서는 을이 갑에게, 길에서는 젊은이가 노인에게 쓰는 2인칭 대명사였다. 그러나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 vous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대신 평범하게 "당신"이라 부르는 것에 가까운 tu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모두를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취급하는 혁명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드골 장군의 비호 아래 vous는 슬금슬금 자기 자리를 다시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1968년 학생운동을 계기로 다시 tu에게 밀려났다. 언어 사용자들이 합의하면 오랜 습관에 대항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SNS의 부흥과 함께 더욱 강력해진 비격식 언어의 세력 하에서 불어의 vous는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tu로 불리느냐 vous로 불리냐느로 인해 야기되는 에너지 낭비와 혼란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단순히 you를 의미하는 대명사를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같은 직업을 가진 동료 시민에게 선배님이 아닌 "씨"로 호칭했다는 이유로 뭇매를 맞은 한 젊은 배우를 생각해 보자. 선배님이라 부른다 해서 없던 존중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놈 저놈 하대한 것도 아닌데 "-씨"라고 불렀다고 해서 화들짝 놀라며 개념과 인성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구성원 간의 합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증거이다. 우리말에도 호칭을 숭배하는 시절을 지나, 동료 인간을 담담히 지칭하는 보편 언어가 필요한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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