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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국 드마라를 보다가 한국어가 닦아놓은 언어의 길에 대해 생각하게 된 적이 있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해 만났더니 강압적으로 키스를 하고 몸을 밀치는 등 성적 괴롭힘과 폭행을 겪은 여자 주인공이 울면서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데, 그 가장 친한 친구가 함께 속상해하면서 여자 주인공에게(즉 피해자에게) "뭘 잘했다고 울어?"라 말하는 장면에서였다.
이 "네가 뭘 잘했다고 우느냐"는 일종의 관용어구는, 보통 (울고 있는) 피해자를 나무라는 데 사용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대체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뭘 잘했다고 울어?"는 우선, 질문일까? 진짜 질문은 아닐 것이다. 많은 한국어의 질문이 그렇듯(예시: 그래서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야?) 수사적인 질문, 즉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책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물어보는 형태를 띠는 거라고 보는 게 옳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순순히 옮겨지는지를 확인해 보면 되는데,
"What did you do well?(당신은 무언가를 잘했습니까?)"와 "Are you crying?(울고 있어?)"는
"What is it about?(그건 무엇 때문입니까?)"와 "Are you crying?(울고 있어?)"가 합쳐진 "What are you crying about?(무엇 때문에 울고 있습니까?)" 처럼 이중의 의문문으로 구성되지 않고 서로 충돌한다. 말이 안되는 질문이어서 그렇다.
말이 안되는, 즉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진짜 질문이 아니다.
이제 이 말 안되는 질문의 내용을 해체해 보자. 무언가를 잘해서 그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울 권리라면 잘못을 한 사람, 즉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울 권리가 없다는 것일까?
설령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울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 누가 정해놓았다 해도 울고 있는 사람에게 자격을 논하는 것은 잔인하고 불필요한 일이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발화의 진의를 추측해 보자면, "너는 잘한 일이 없으므로 (중간의 논리는 생략) 울 자격 또한 없다)"라면 궁극적으로는 "너는 울음을 그쳐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한 것일까?
즉, 울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는 너무 이상하기에 굳이 의미를 부여해 주자면, "내 말의 내용은 중요치 않고 아무튼 우는 것은 네게 좋지 않으니 그만 울어라" 라는 좋은 의도인 것일까? 그렇다면 "뭘 잘했다고 울어?"는 실은 다정하게 달래는 맥락에서 쓰여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치면 문제 없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울음을 그치라는 윽박지름일까? 만약 그렇다면 다시, 잔인하고 불필요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에 대한 합의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을 굳이 하고 나서 송신자와 수신자의 심경은 어떻게 다를까? 더 나아질까? 더 나빠질까? 좋고 나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인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복잡한 것일까?
수많은 질문이 생기지만 모두가 하나로 귀결된다.
"뭘 잘했다고 울어"는 대체 왜, 고집스럽게, 오가는 신호를 교란시키며 거기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여기 놔두고, 비슷하지만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내 수업에 들어오는 학원 선생님 중 한 명은 이제 누군가 "저게 무슨 소리지?" 싶은 한국어를 할 때마다 그 상황과 정확한 발화 의미를 기억해 둔다고 한다. 그가 가르치는 아동 중 한 명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런데 지금 뭐하는 거에요?"라는 질문을 해서 왜 그런 질문이 나오는지 궁금해하던 중 공개수업의 기회가 생겼다. 그는 해당 아동을 관찰해 달라고 동료 강사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동료 강사들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 아동은 액체괴물을 만지는 등 손으로 딴짓을 계속 하며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묻는다는 거였다.
이 이야기가 강사 회의 중 나오자, 다른 선생님 하나가 "그래서 내가 엄청 야단쳤잖아요, 눈치 없다고."
여기서 "눈치 없다"는 정확히 무슨 말일까? "Pay attention.(집중해라)."고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몰라도, 이 맥락에서의 "눈치 없다"를 영어로 전달하는 방법은 없다. "take a hint!(말귀 좀 알아들어/분위기 좀 읽어)"가 비슷한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선생님이 질문한 학생에게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수업 분위기를 깬 것에 대한 언짢음이 있다면 "친구들이 공부하는데 방해하지 말아라."거나 "질문은 나중에 해라."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질문은 아무때나 큰 소리로 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러면 다시 "'뭘 잘했다고 울어?"의 질문으로 돌아가 둘을 만나게 해 보자.
"너는 눈치가 없다."는 왜 "집중해라."를 이기고 그 자리에 들어왔을까? 눈치를 언급한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언어의 맥락이 그 지점에 그 발화를 골라넣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평소에 정말 우리가 하는 말을 통제하고 있을까?
언어가 감옥이라면(Languages is a prison for our thoughts) 간수는 그 언어가 닦아놓은 길이다. 관용어구가 될 수도 있고, 사자성어가 될 수도 있고, "앵두같은 입술"이나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흔한 형용어와 명사와 만남일 수도 있다.
폭력이나 괴롭힘으로 인한 좌절감을 호소하며 우는 피해자에게 그 가족이나 친구가 "뭘 잘했다고 울어?"라 말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언어라면, 그건 그 언어가 닦아놓은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눈물을 흘릴 자격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기보다, 이미 감정적으로 곤란에 처한 사람에게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동시에 더이상의 피해 사실의 고발을 막으려는 것이 발화의 목적이라면? 그리고 그에 더하여, 말한 사람에게 상처줄 의도는 없었지만"왠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피해자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학습된 기억에 의하여 일종의 사회적 대본을 수행하고 있는 거라면?
내가 열심히 강의하는 와중에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에요?"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a. 큰 소리로 질문해서 수업의 맥을 끊어놓는 사람
b. "수업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를 알리는 사람
a와 b 중 무엇을 보는지를 선택하는 것이 나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언어 pool인가? 그 상황에 반응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결정하는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것의 올바른 채널이 되어주는가?
"뭘 잘했다고 우냐니,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이야?" 라고 울던 사람이 따져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우는 이를 진정으로 염려하거나 위로하는 사람은 "뭘 잘했다고 울어?"를 자기의 언어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어떤 이유에선지 우는 이가 밉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뭘 잘했다고 울어?"는 맥락 내에서 막다른 길을 만들어내며 혼란과 좌절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언어에서, 언어가 사용하고 있는 대본에서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일종의 바이러스다.
우리 안에 이제 "뭘 잘했다고 울어"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있다는 점을 이용하면 내가 외부세계와 주고받는 신호는 좀 더 분명해진다. 나에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를 신호가 들어왔을 때 그 발화가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지, 번역할 수 있다면 해당 상황에 재조립했을 때도 여전히 한국어처럼 잘 버티고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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