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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릴 때부터 학교 국어 시간에, 혹은 일간지 사설에서 “한국어는 여러 다른 색을 지칭하는 형용사가 많은 언어”라는 주장을 자주 접했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로 노란, 샛노란, 누런, 누르스름한, 노리끼리한, 누르죽죽한 등의 형용어를 드는 것도 많이 보았다. 일단 같은 스펙트럼 안에 있는 색을 표현하는 단어 가짓수가 많으니 별 의문을 갖지 않고 그런가보다 했던 것 같다. 

그런 색깔 이름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한탄할 때, 열심히 요리했는데 결과물의 색감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언급하는 색의 이름은 반드시 "노리끼리", "푸르죽죽", "시커먼" 등이었다. 

그 많은 한국어의 색상 이름들은 대개는 정말 색상표에 올릴 수 있을만한, 다른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어에 "좋고 싫음"이 담겨있을 뿐이지, 혹은 "응당 이런 색이어야 하는 것이 무언가 다른 톤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언급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사용할 뿐이지 레몬색과 황금색이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장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노리끼리"를 쳐보면 치아 화이트닝 시술의 비포와 애프터 사진이 뜬다. 비포의 치아 사진은 흔히 말하는 착색된 상태이다. 색으로만 치면 흰색보다는 노란색에 가깝다. 베이지나 아이보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프터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스노우 화이트, 눈처럼 흰색이다. 상쾌하고 깨끗해 보인다. 

그래서 "누리끼리한 치아를 새하얗게" 라는 구호가 "노란 치아를 하얀색으로"보다 호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호오를 담지 않고 누리끼리한 가을 논밭, 누리끼리한 강아지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현대 한국어에서 누리끼리가 지칭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란색"이라는 것이다. 산뜻하게 노란 톤의 봄옷을 차려입고 나갔는데 누가 "노란색 옷을 입었구나!"라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한 옷을 입었네."라고 하면 기분이 상한다. 언어 안에 감정과 판단이 들어가 있다.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다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서로 다른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한국어는 색상 이름 안에 나의 좋고 싫음을 숨겨 놓았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사고를 가두는 틀이 되기도 한다. "많이 처먹어라!"같은 경멸의 말을 쓰면서 상대를 보면 그 언어가 가진 만큼의 공격성이 그 사람에 대한 감정에 더해진다. "너 이마빡에 그게 뭐야?"라고 질문하면 그것은 더이상 "What's that on your forehead?(너의 이마에 그게 무엇이야?)"라는 질문이 아니게 된다. 질문과 모욕을 동시에 주면서 발화의 진짜 메시지를 흐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 더해,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한국어의 특정 어휘나 일부 어미는 철저히 위계를 따른다. 교수님이나 대통령에게 "똑바로 서세요."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자세를 취해 주시겠습니까?"가 고작일 것이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언어에 호흡곤란과 과부하가 온다. 말 걸기가 힘든 사람일수록 성공한 사람이 된다. 영어로는 "Stand straight, please." 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니 만약 스스로에게 "How am I feeling now?"라고 물었을 때 더이상 배가되면 곤란할 정도의 분노나 좌절감이 들었다면, 한국어로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영어로 스위치해 보자. 누군가 내게 이유없는 공격성을 드러냈다면 간단한 영어로 번역해 보자. 

"You're late.(너 늦었어)."면 충분했을 말을 "어딜 그렇게 싸다니다 이제 기어들어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한국어 이외의 말로는 좀처럼 번역되지 않는 저 공격성"을 인지하고, 딱 그만치의 도발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한국어는 대단히 흥미로우며 섬세한 언어이다. 위계와 분위기를 매우 잘 읽어내며 주변을 배려한다. 다만 매우 여러 겹의 모욕을 다른 언어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재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영어 욕 f워드가 다채로운 한국어 욕의 카타르시스를 못 따라가는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말이, 언어가, 대화가 거기에 필요없는 감정을 끌어온다면, 바로 인지하고 분류하는 연습을 해보자. 생각 외로 많은 것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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