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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일 때 충북 음성의 한 복지단체로 단체봉사활동을 갔었다. 60점 가량의 봉사점수를 의무적으로 채워야 내신점수에 손해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또래 친구들은 방학이 되면 봉사점수를 인정해 주는 곳을 찾아 닥치는 대로 공공기관을 전전하곤 했다. 두 시간, 세 시간, 한 시간 반씩 애걸하며 봉사시간을 채워넣다가 2박 3일의 합숙이 끝나면 30시간, 즉 중학교 3년 내내 채워야 하는 봉사시간의 절반을 한 번에 인정해주는 대형 복지단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구원을 만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기숙사에 묵었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어버렸다고 비명을 지르며 한겨울 산비탈을 뛰어내려가곤 했다. 봉사점수 때문에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온 중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기관 측은 첫날 한 시간 정도 비디오를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교육을 대신했다. 산 아래 큰 병동들 안에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과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주로 주방 설거지와 청소 등 입주민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 일을 시켰다. 환자들의 생활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둘째날쯤, 어쩌다가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와 가까운 친구들 몇이 환자들이 생활하는 구역 안으로 불러들여져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원체 싹싹하지도 않고 생글생글 잘 웃지도 못하는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냥 낯선 사람도 아니고 어른이었다. 어른인데 아픈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대해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고 매뉴얼이나 프로토콜도 전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이리 오라고 말을 걸지 않았고 저리 가 버리라고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뭔가 하고 싶었다. 내가 이제까지 알던 봉사활동은 구청 계단에서 담배꽁초를 줍거나 전철역 앞에서 띠를 두르고 서 있는 것뿐이었지만 지금이야말로 뭔가 좋은 일을,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볼 기회인 것 같았다.
그러다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봉사자가 휠체어에 앉은 중년의 여성에게 반말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을 보았다. 둘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 같았고, 친해 보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매우 마른, 어깨 아래까지 파마한 머리칼을 하고 휠체어에 깃털처럼 얹힌 그 여성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힘겨워 보였는데도 온 얼굴로 웃고 있었다. 바로 저것이 내가 하러 온 봉사활동이다, 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교회 홍보잡지에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식사시간이 끝나고 다들 조용해진 틈을 타 그에게로 다가가서 뭐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보았다. 아주 상냥하게. 반말로. 나름 아까 보고 배운 대로 활짝 웃어보였던 것도 같다. 그는 처음 보는 내가 중언부언 묻는 말에 천천히 답해주다가, 한순간 고개를 살짝 꺾고 또박또박, 천천히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너 왜 나한테 반말해. 너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냐?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방바닥의 열기와, 머리가 멍해지던 혼란과 약간의 공포가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뭐라고 차마 대답을 못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후부터는 너무 추운데도 항상 식당 문 옆의 공중전화 자리에서만 맴돌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리고 그 일은 잊혀졌다. 가끔 기억 어디엔가 잘 접혀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길 가던 내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기억을 갈무리했었다.
그러다 나는 새로운 말을 배우고, 멀리서 온 사람들과 교류했고, 몰랐던 인간 상호작용의 다른 측면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때보다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였다. 중학생이었던 나의 행동을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언어가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것은.
내가 도망치듯 병동을 빠져나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부끄러움을 느꼈고(ashamed). 동시에 죄책감(guilt)이 들어서였다. 뭘 얼마나 잘못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게 받았을 모욕감이 그 표정에서 너무 생생히 전달되어서. 나는 "싸가지가 없었"던 것일까? 혹은 "어른을 대할 때의 태도가 나빴던" 것일까?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어른이 아닌 것은 아닌데, 나는 명백히 그보다 어리고 그와 친한 사이도 아닌데, 초면에 중학생이 다가와서 아이 달래는 투로 하는 반말에 그가 대답해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휠체어 위에 앉아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에게 condescending하고 patronizing하게 굴었던 것이다. 이 둘은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은인인 체하는, 거만한, 잘난척하는, 깔보는, 무시하는"등으로 풀이된다. 모두 맞는 말이지만 영어로 사용될 때의 뉘앙스를 100% 옮기지는 못한다. 내가 최선을 다해 설명해 보자면 "내가 너보다 잘났다는 확신에 기반한 모욕적인 태도로 남을 기만하거나 상처주는 것"이다. 이 단어를 찾고 나서 흩어졌던 퍼즐이 맞춰진 것 같았다. 나는 싸가지가 없지 않았다.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 통일된 정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에게 악의를 품고 못된 행동을 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그를 어른으로 대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반말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모든 움직임의 동기는 선의였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부끄럽고 좌절했던 거였다.
하지만 그때 내가 알던 언어로는, 나의 태도가 싸가지가 없었구나 하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순수한 악의를 갖지 않더라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타인을 깔보고 미리 재단하는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내 행동의 진짜 문제는 아주 천천히 깨달아졌다. 그냥 싸가지가 없거나 말뽄새가 글러먹었거나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많은 일들이 아주 세밀한 다른 형용사들로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천천히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그 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내가 뭐라고 사과했어야 했었을지 이제는 안다. 영어로 "I'm sorry. I was being patronizing and condescending.(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patronizing하고 condescending하게 굴었어요)라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당신을 이미 판단한 후에, 그 잘못된 판단을 근거로 당신에게 불쾌감을 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나의 태도를 반성하고 사과한다."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가끔 그 날을 생각한다. 눈이 한 번 내리면 녹지를 않던, 아주 추웠던 산비탈의 그 병동과 지나치게 따뜻했던 방바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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