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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다 남의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권도 있어요(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그걸 kibun이라고 부르죠."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미드 중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Orange is the new black)"라는 시리즈가 있다. 미국 감옥의 여성 재소자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인데, 이 미드의 주인공인 파이퍼가 갑자기 한국어 단어를 끄집어내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뉴욕에 있는 한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파이퍼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틀간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받는다. 감옥의 모두가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와중에 러시아계인 주방 담당만이 진지하게 "감옥에 오기 전 나의 자랑이던, 사랑받는 동네 맛집이었던 내 러시아 식당에 가서 모든 게 예전처럼 잘 돌아가는지를 보고 와달라"고 부탁한다. 파이퍼는 식당이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지만 감옥에 돌아와서 막상 그래 어떻더냐는 주방 담당을 마주하자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여전히 아주 인기가 있는 식당이었다고 전한다.

결국 이 거짓말이 들통나고 식당이 사실은 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방 담당은 파이퍼에게 화를 내고, 그 때 파이퍼의 변명이 이것이다.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진실보다 중요한 문화권도 있고, 자신은 그런 입장에서 행동했다는 것이다. 거짓말에 대한 해명치고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파이퍼의 뻔뻔함을 웃어넘기더라도 영어로 해석한 "기분"은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을 때만 가능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는데, 기분을 지켜주는 것이 누군가의 품위와 연관될 정도로 중요한 사회적 의식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언어학자 Akira Okrent가 지적하듯이 "기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와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한 한국만의 무엇이다. 한국어가 아니면 온전히 표현할 수 없고 똑같은 맥락으로 쓸 수도 없다. 우리가 영어로 알고 있는 타이어를 한국어로 고무바퀴라고 설명해도 뭔가 미진함이 남는 것과 같다. 외부인으로서 그가 이해한 "기분"은 mood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인간 관계에 대한 무언가를 뜻하는 단어다. 세상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 나의 지위가 얼마나 높고 낮은지를 항상 인식하는 어떤 정신의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의 기분을 (알아서) 헤아리는 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배려를 넘어선, 그의 지위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기분 상하게 하지 마."는 예의를 지켜달라는 뜻만도 아니고,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뜻만도 아니며, 자기가 누군지 알아달라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내 기분과 그 기분을 결정하는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세상은 그 모두를 포함하게 된다. 나를 존중해 줘, 나를 보살펴 줘, 나를 읽어줘, 라는 "말해지지 않은 무언가"가 기분으로 수렴한다. 그래서 기분은 결국,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때가 많다. 

또한 감정을 "기분"에 일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여러 형태와 온도들을, 좋거나 나쁜 두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일직선상에 가두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상태를 명확히 소통하려면 때로는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feeling offended(불쾌한) 쪽인지 혹은 feeling guilty(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feeling ashamed(수치심을 느끼는) 것인지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왔다. 긍정적인 감정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행복이란 단어는 너무 거창하고 기쁘다고 말하기엔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그냥 "오, 좋다!"고 말하곤 했다. 친구들과 놀러간 펜션이 아주 예쁘고 넓어 마음에 들 때도 좋다고 말하고 원하는 시험성적이 나왔을 때도좋다고 말했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거나(feel proud) 흥분된다(excited), 희망차다(hopeful)라고 말하기는 왠지 그랬다. 그냥, 기분이 좋다거나 짱 좋다거나 존나 좋다거나 개좋은 식으로 약간의 변동은 있었지만 항상, 그냥 "좋다"였다. 

"나쁜 기분"을 원형으로 두고, 거기서 세분화되는 슬픔, 공포, 혼란, 분노, 좌절 등을 다음의 큰 지표로 삼아 더듬더듬 찾아가다 보면 나의 일상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인으로 뭘 지목할 수 있을지가 드러나곤 했다.

각 문화권마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르다. 형용사의 개수가 다르고 표현하기 꺼려하는 감정이 다르다. 북반구의 추운 문화권에만 "한겨울 따뜻한 실내에 사람들과 모여 담소를 나누는 것의 아늑함"을 묘사하는 언어가 있듯이 한국어에는 분노와 좌절과 슬픔과 무력감을 한번에 표현하는 "억울함"이 있다. 일본어에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나 "다테마에"와 진실과 더 가까우며 보통은 숨겨져 있는 나인 "혼네"를 뜻하는 단어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한국어에는 (본디 사랑과 애착에 관한 단어였다지만) 화자의 이득을 충족시켜주는 쪽으로 자유롭게 변용되기 쉬운 "정"이 있다. 

흔히 사용되는 감정 단어의 스펙트럼이 대체로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조차 다르다. 한국어에서 흔히 쓰이는 감정단어는 400여개이고 그 중 부정적 감정이 무려 72%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릴 수는 없으나 우리 문화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긍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보다 쉽게 허용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감정을 세분화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해 부정적인 감정만은 빈번하게 표출되고 있다면 그것은 "소통을 위해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 덩어리가 자주 서로에게 가서 꽂히는" 상황이라는 것의 반증 아닐까? 짜증이 나거나 억울하거나 섭섭한 감정이 들었을 때, 다른 언어를 빌려 내 감정을 해체해 보는 것은 그래서 더욱 해볼만한 일이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이름을 따로 쓰지 않는 문화권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초록과 파랑을 같은 색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호주의 한 부족은 언어에 "왼쪽, 오른쪽, 앞, 뒤" 같은, 1인칭 기준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그들은 세계를 동서남북, 즉 4방위 기준으로 이해한다. "컵을 왼쪽으로 옮겨놔." 대신 "컵을 북북서로 이동시켜."라는 식이다. 그래서 그들은 5세만 되어도 나침밤이나 구글맵 없이 자신의 위치를 안다고 한다.  언어가 세상의 식별하는 데 얼마만큼의 힘이 있는지, 더 나아가 우리가 다른 언어를 빌렸을 때 얼마나 많은 새로운 일들이 가능할지에 대한 강력한 예시다.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한국인", "화가 많은 한국인"은 이제 문화권의 특성이려니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하루에 열 번씩도 더 부글부글 올라오는 감정, 혹은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갑자기 심박수가 올라가는 원인모를 불안,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싶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좌절은 우리의 초록이고 파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초록색을 파란색이라고 믿는 것처럼 분노를 억울함이라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에 적절한 이름이 없는 것은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 혼란스럽고 비통한 가운데 남겨 놓는다. 그래서 바깥의 말이, 새로운 단어의 수용이, 낯설음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낯익은 감정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미분화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언어를 지도 삼아 샅샅이 살펴보는 일은 새로운 종류의 재미와 생각의 근육을 연마하는 일이기까지 하다. 

감정의 스펙트럼을 새로 배우는 것, 외국인들이나 쓰는 이국적이고 유난한 무언가라 생각했던 색색의 형용사를 내면화하는 것, 내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고 이름붙이는 것은 내게 다른 세상을 열어 주고 관계를 맺고 키우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냥 우울한 게 아니고 좌절(,frustrated)하고 실망(disapoointed)한 것, 그냥 짜증나는 게 아니라 초조(nervous)한 것, 억울한 게 아니라 분노한(enraged) 것. 다른 언어로 내 기분을 다시 해석해 보면 나를 더 잘 이해할 수조차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끌어안고 나아가는 무거운 발걸음을 다소나마 덜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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