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를 다닐 때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모여 전체조회를 했었다.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 발을 끌며 모인 아이들은 높다란 단상에 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웅웅거리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고, 내 바로 앞의 아이들은 선생님 몰래 서로의 신발을 차며 장난을 쳤다. 눈부신 아침의 햇살이 서서히 뙤약볕이 되도록 간간이 마이크 앞에 선 어른의 얼굴만 바뀌어 가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얘기는 끝이 없었고, 가끔씩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의 열을 바로잡는다며 등을 쿡쿡 찌르며 지나갔다. "똑바로 서."하면서. 척추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체육 선생님은 가끔 "똑바로 해라, 똑바로."라며 으름장을 놓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똑바로"라..

나는 어릴 때 눈치가 없는 아이였다. 그냥 분위기를 읽을 줄 모르는 것뿐 아니라 분명히 내게로 향하는 냉소적인 빈정거림이나 예의상 하는 말도 잘 구분하지 못해서 멍하니 홀로 남겨지는 일이 잦았다. 마음에 드는 친구가 있으면 하도 옆에서 말을 걸고 귀찮게 굴어서 그 친구가 마침내 치를 떨고 주변에 나의 악행을 고발할 때까지 쫓아다녔고, 나에게 친절한 어른이 "나중에 이모 집에 또 놀러 와."라고 하면 언제 또 놀러가는지를 엄마에게 묻고 또 물어 결국 호통을 듣곤 했다. 한번은 가족 모두가 한강에 놀러 갔다가 밤낚시에 푹 빠진 아빠를 남겨두고 엄마 손을 잡고 돌아오는데, 엄마가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당시 채 개발되지 않아 진흙뻘 투성이에 억새가 내 키만큼 자란 그 길은 엄마와 함께 있어도..

나는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가 되자마자 술을 너무나 좋아하게 되었다. 항상 지나치게 고민하고 긴장해 있는 내게 주변 사물을 블러 처리 해주는 알코올은 그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음료였다. 생맥주 오백을 한잔 들이키면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잘 웃는 사람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단어를 수십번씩 고르느라 자주 말이 끊어지는 나는 사라지고, 머릿속의 국어사전 없이 술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실수에 대해 자꾸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상대를 너무 배려하느라, 그리고 상대도 배려가 충만한 사람이라 결국 하나도 친해지지 못하는 상황도 소맥 말아 회오리를 돌리면 해결이었다. 태국에 놀러갔을 때는 친구들과 칵테일을 세 잔이나 마시고야 길거리 노점에서 흥정 비슷한 것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한때 유명했던 사고실험이 있다. 둘로 갈라진 레일이 있고 한쪽 레일엔 열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일하는 노동자가, 다른 쪽 레일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꼼짝할 수 없게 묶여 있다. 내가 저만치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로를 변경하면 남자가 열차에 치어 죽겠지만 다섯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나는 레버를 당길 것인가?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한 명의 목숨은 다섯 명의 것보다 덜 소중한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레버를 당기지 않는다면 다섯 인간의 목숨에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트롤리 사고실험"으로 알려진 이 질문은 여러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심술궂기도 하고), 무인자동차에게 "토끼를 치고 더 큰 사고를 피할 것인지 토끼를 살리고 사..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평년보다 따스한 날씨가 지속되다 갑자기 밤새 기온이 뚝 떨어졌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불평할 여유도 없을 만큼의 숨막히는 추위에 꾸물꾸물한 회색 하늘이 내가 처음 만난 뉴욕이었다. 검색대를 거쳐 밀고 나오다 너무 무거워 세 걸음에 한번씩 나를 멈추게 했던 이민가방에는 생뚱맞게 김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는 마치 캠핑 떠나는 사람처럼 코펠을 싸주었고 나는 저항할 힘도 없어 그 짐을 들고 비행기를 탔었다. 한번도 자식을 유학보낸 적 없는 부모는 휴대용 냄비와 대용량 포장된 김을 커다란 짐가방에 쑤셔넣으며 주문처럼 다 필요할 거라고 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배낭에 크로스백 하나에 커다란 이민가방, 그리고 또 더플백이 하나가 있었다. 기내에..
나에게는 오랜,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손톱 주변 피부를 뜯어내는 것, 그리고 일명 "돼지털"이라 불리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골라내서 뽑는 것. 손끝을 쥐어뜯는 버릇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머리카락을 뽑는 건 중학교 때 시작되었다. 손끝은 가을이 되면 건조해진다. 말랑하던 부분이 굳어지며 다른 손가락으로 건드리기 좋게 각이 잡힌다. 특히 손톱 주위의 거스러미가 그렇다. 매끈하지 않은 그 피부의 요철을 마치 염주 세듯 손가락 끝으로 쉼없이 매만지며 마음의 안정을 얻다가 툭, 잡아뜯어 곧잘 피를 보곤 했다. 피부가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면 염증이 생겨 부풀어 오르거나 딱딱하게 굳는다. 그러면 만질거리가 더 생기는 셈이다. 뜯어내는 부위가 확장된다. 고등학생 때는 증세가 너무 심각..
나는 발리를 참 좋아한다. "신들의 섬"으로 잘 알려진 아름다운 열대의 섬. 어딜 가나 풍성한 녹색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곳, 바다도 산도 깊고 푸른 곳. 내가 발리에 반한 순간은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짜낭(canang)을 발견했을 때였다. 바나나 잎과 얇게 자른 대나무를 엮어 만든 손바닥만한 바구니에 색색의 꽃과 약간의 과자, 혹은 쌀밥을 넣어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인 짜낭은 깊은 산의 계곡에도 면세점 바닥에도 놓여있다. 안에 든 약간의 음식은 거리의 개나 고양이, 원숭이들이 먹는다. 색 바래져가는 꽃과 향 태운 흔적만이 남은 짜낭은 해질녘이 되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채여 온통 찌그러지고 때가 타는데, 발리 사람들은 눈 꿈쩍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새 짜낭을 그림같이 예쁘게 만들어 ..
나는 12주 과정의 한 학기짜리인 영어수업을 운영한다. 영어교육을 전공하고 여러 문화권의 여러 언어 사용자들을 가르쳐본 후에 내린, 바이링구얼리즘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을 실감할 기회가 어학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수업계획들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션 중 하나는 한국어 감정을 영어로 옮기는 수업이다. 영어 서사의 특징 때문이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참치김밥을 먹었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식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한국어 서사와 달리 영어는 "우리는 사방의 창이 모두 푸른 숲을 향해 나 있는 박사의 주방에서 마호가니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처럼 시각 정보를 중히 여긴다.또 하나 중요한 영어 서사의 특징은 ..
나는 모 대학 안에 있었던 여고에 다녔다. 산비탈 위에 올라앉은 그 학교는 아래쪽의 얼기설기 여러 갈래인 동네 골목길로도 접근이 가능했고 점심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남자 대학생들이 계단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며 쳐다보기도 해서, 별로 바깥과 단절된 느낌이 아니었다. "바바리맨"이라고 불리던 성폭력범이자 노출증, 성도착증 환자도 간혹 나타났다. 아이들의 반응은 다양했는데, 내가 본 중 가장 적절한 대응이자 용감한 것 중 하나는 혼자 운동장에 벤치에서 밥을 먹다가, 운동장 아래 골목길에 나타난 바바리맨이 나타나 학생들이 웅성웅성 하자 조용히 일어나 그에게 냅다 식판을 던져버린 3학년 언니였다. 깔깔대며 남자를 조롱하는 아이들, 큰 소리로 욕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두어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그들은 ..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왜 질문하는 것이 따지고 드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라도,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는 언어적 특성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한국어는 언어적 밀치기에 최적화된, 일종의 말로 하는 닭싸움에 능숙한 언어다. “고객”에 “님”을 붙이고도 안심이 안되어 “께서”를 동원하여 혹시라도 기분이 상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수준부터, 뭘 누구에게 달라는 것인지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된 “내놔.”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위계가 이 미세한 언어의 눈금으로 구분될 수 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젊은 여성에게 중년의 남자가 “여기는 뭐가 맛있어요?”로 무난한 경어를 쓰는가 싶더니 곧 “아이, 난 생선은 안 좋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