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산책을 나가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개도 기뻐하고, 나도 바깥 공기를 쬐며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출근하느라 허덕이는 게 아닌, 혹은 퇴근하면서 하루 일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게 아닌 일부러 짬을 내서 하는 산책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집 앞 교차로의 큰 가로수들에 걸린 햇살이 얼마나 몽롱하고 예쁜지, 개들을 데리고가 아니면 입구도 들어가보지 않았을 낮은 뒷산에서 얼마나 좋은 풀내음이 나는지를 천천히 깨닫는 일은 하루치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기에 모자라지 않다.그러나 가끔 불쾌한 일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뜸 다가와 "개 물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샌드위치를 사느라 개 두 마리를 가게 앞에 묶어두고 기다리게 한 후 나..
"4등"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대회에서 늘 4등만 하던 어린 수영 영재를 1등 하는 천재로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어머니와 코치의 이야기인데, 코치가 아동을 몰아세우며 훈련시키는 모습들이 내게 너무나 친숙한, 그리고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성장과정에 경험했을 그루밍grooming의 전형이라 놀라웠다. 아직도 아이들이 저런 방식으로 배우는구나 싶어 좌절스럽기까지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소년은 숨이 턱까지 차도록 수영장 레인을 왕복하지만 코치의 대걸레자루 세례를 받고, 젖은 등에 멍이 들 때까지 맞는다. 그리고 코치는 아이를 분식집으로 데려가 떡볶이와 핫도그를 사주면서 "너 잘 되라고 때리는 거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고 은근한 태도로 달랜다. 아이는 반복해서 맞고, 욕설을 듣고, 또래들이 지켜보는..
어릴 적 급식을 받을 때, 밥을 꼭 크게 한 주걱, 다음엔 보통 주걱으로 두 번 퍼주시던 영양사 분이 계셨다. 그는 보통 말없이 배식에만 열중했지만 가끔 혼잣말처럼, 탄식처럼 "한번만 주면 정 없으니까!" 라며 박자를 맞추어 두번째 주걱을 급식판에 탁 털어주곤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정"이 실체를 갖춘 무언가로 내 앞에 나타난 일이. 안 줬어도 상관 없었겠지만, 아니면 밥의 정량을 배식하기엔 너무 크거나 작은 주걱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내가 처음 목격한 "정"은 급식판의 오목한 곳에 떨어지는 두번째 밥덩어리였다.그 이후의 내 인생의 "정"들은 첫번째 것만큼 명료하거나 친절한 제스처를 포함한 것들이 아니었다. 사귀던 남자친구가 내게 정이 떨어진다고 말하거나, 엄마가 나더러..
나는 개를 기르는 1인 가정이다. 지금은 내 개인 골든두들 한 마리에, 가족을 찾을 때까지 임시보호중인 푸들까지 당분간 두 마리를 돌보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개를 키우는 것도 그렇다. 인간과 건강한 상호작용을 해야 건강하고 행복한 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개를 산책시킬 때 우호적으로 반응하며 개에게 인사하거나 개를 봤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사람들 덕에 내가 개와 함께 사는 일이 나날이 조금씩 쉬워진다고 믿고 있다. 예전에 비해 개를 보고 갑자기 도망을 가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훨씬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와 거리를 나선다는 것, 모르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
"드세다"는 말에 대해 두 번 생각해보지 않고 쓰던 시절이 있었다. 주로 동료 여성들에게, 특히 나보다 어린 여성에게, 그리고 동물에게 사용했다. 그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때, 그리고 그들이 자기 지위에 걸맞지 않게 분노를 공적으로 표출할 때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형용어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구글 검색어 자동완성에 "드센 여자친구"는 있어도 "드센 남자친구"는 없다. 누군가는 "저러더 드센 여자래요. 드세면 안 좋은 건데. 뭐가 드세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안 드센 여자에요?" 라고 집단지성에 도움을 요청한 글이 보이기도 한다. 이 질문에는 다수의 답변자들도 갈팡질팡한다. "생활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고, 자기 생각도 강한 사람이란 뜻도 있는 거 아닐까요."라며 좋게 해석해 주는 위로의..
"한국인들은 왜 항상 화가 나 있어?"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캘리포니아가 고향인 친구 한 명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오면서 들떴던 마음이 도착 첫날 택시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차갑게 가라앉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절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다만 흘끗흘끗 시선을 피해서만 서로를 바라보고, 말을 걸지 않고, 웃지도 않고, 아저씨들은 소리를 지른다고.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특히 사람을 대면할 때는 항상 정신적인 가드를 올리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어디서 누가 시비를 걸어올지 모르고, "만만하게" 볼지 모르고, 나를 "무시할지" 모른다는 옅은 공포가 안개처럼 모두를 휘감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K-rage라는 말이 있다. 한국인들 특유의 불같은 울화와 빠르게 고조되는 공격성을 ..
중학생일 때 충북 음성의 한 복지단체로 단체봉사활동을 갔었다. 60점 가량의 봉사점수를 의무적으로 채워야 내신점수에 손해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또래 친구들은 방학이 되면 봉사점수를 인정해 주는 곳을 찾아 닥치는 대로 공공기관을 전전하곤 했다. 두 시간, 세 시간, 한 시간 반씩 애걸하며 봉사시간을 채워넣다가 2박 3일의 합숙이 끝나면 30시간, 즉 중학교 3년 내내 채워야 하는 봉사시간의 절반을 한 번에 인정해주는 대형 복지단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구원을 만난 기분이었다. 우리는 기숙사에 묵었고 새벽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어버렸다고 비명을 지르며 한겨울 산비탈을 뛰어내려가곤 했다. 봉사점수 때문에 단체로 버스를 타고 온 중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
나는 숫자에 매우 약하다. 새로 이사한 집 주소를 외우는 데 한 달은 족히 걸렸는데도 아직도 행정구역 다음의 숫자를 불러줄 때가 되면 스스로가 못 미더워 맥도날드 배달 서비스 앱에 입력해둔 주소를 자꾸 확인한다. 방향감각도 엉망이다.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길을 찾기 때문에 공원이나 스타벅스가 없어지면 큰일이다. 거의 평생을 살았던 동네인 합정역 전철역사 안에서 마음먹은 대로 출구를 골라서 찾아 나오게 된 것은 대학교에 가서였다. 여태 생존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본적인 감각을 결핍한 나이지만, 이를 보상하기 위해 발달한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살 자리인지 못 살 자리인지를 언어로 알아보는 능력이다. 나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혹은 내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지를 살피고 혹시 모를 오해와 소통 오..
어릴 적 학원에 다녀와 숙제까지 마치고 운이 좋으면 거실에서 TV 보는 엄마 아빠 틈에 슬며시 끼어들어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그 중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하나가 배우 김희선이 극중 남자친구와 말싸움을 하다 뺨을 맞는 장면이었는데, 갑작스런 폭력에 놀란 그가 "너무 아파 민기야, 너무 아파."라며 주저앉아 울자 뺨을 때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대던 남자친구가 할 수 없다는 듯 안아 달래는 내용이었다. 윤기나는 검은 긴머리를 머리띠로 곱게 쓸어넘기고 천사같은 원피스를 입은 예쁜 배우가 난데없이 뺨을 맞는 것 때문이었는지 여자친구에게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해 놓고도 씩씩거리던 남자 때문이었는지 여자의 뺨을 때리는 행위가 싸움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하는 한 도구로 묘사된 것 같은 연출 때문이었는지 아주 옛날 ..
한국에서 나서 자라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혹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말을 예쁘게 하라는 요구를 종종 들어왔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언짢아지지만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말을 예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어는 말을 어떻게 맺느냐가 중요한 언어이므로 "-해 주세요."를 "해주실 수 있어요?" 정도로 바꾸라는 얘기일까? 즉 좀 더 정중한 표현을 써 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보기에 예쁘도록 무표정보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라는 것일까? 예쁜 것은 시각에 달린 일인데 언어신호를 어떻게 예쁘게 보낸다는 걸까? 말을 예쁘게 하라는 요구는 주로 직위가 낮은 사람, 여성, 어린이,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직종을 향한다. 국회의원, 대학교수, 혹은 중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