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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급식을 받을 때, 밥을 꼭 크게 한 주걱, 다음엔 보통 주걱으로 두 번 퍼주시던 영양사 분이 계셨다. 그는 보통 말없이 배식에만 열중했지만 가끔 혼잣말처럼, 탄식처럼 "한번만 주면 정 없으니까!" 라며 박자를 맞추어 두번째 주걱을 급식판에 탁 털어주곤 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정"이 실체를 갖춘 무언가로 내 앞에 나타난 일이. 안 줬어도 상관 없었겠지만, 아니면 밥의 정량을 배식하기엔 너무 크거나 작은 주걱 때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내가 처음 목격한 "정"은 급식판의 오목한 곳에 떨어지는 두번째 밥덩어리였다.

그 이후의 내 인생의 "정"들은 첫번째 것만큼 명료하거나 친절한 제스처를 포함한 것들이 아니었다. 사귀던 남자친구가 내게 정이 떨어진다고 말하거나, 엄마가 나더러 정이 없다고 나무랄 때나 한번씩 들었다. 그리고 정이 어쨌다는 말 중에서도 정 떨어진다는 소리는 특히 좋지가 않았다. 나를 사랑하다가 그만 사랑하겠다는 선언인지 아니면 그냥 순화된 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국어 교과서에 한국인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무엇이며 민족을 하나로 엮어주는 힘이라고도 말하는 그것, 뭉클하고 포근하며 선한 것으로 묘사되는 그것, 대단히 중요하다고 추어올려지는 그 무엇. 사전을 찾아보면 "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막상 사랑을 논할 때 사용되지는 않고, 사랑이 끝날 때나 "사랑이 없으면 정은 있어?"라는 이상한 문장에 등장하는 그것. 사랑까지는 아니고 애착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또 애착보다는 뭔가 거대하고 끈질긴 것을 칭하는 것 같은, "정". 얼마 전까지 그 정이 진짜 무언지에 대해 궁금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댓글을 읽기 전까지는. 

"며느라기"라는 웹툰이 있다. 명절에 주로 불거지는, 상대 배우자 가족과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며느리이자 아내의 입장에서 그린 만화이다. 이에 결혼한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지금은 단행본도 출간된 상태다. 헌데 이 만화의 내용 중 주인공 커플의 갈등이 고조되어가는 과정에서, 주인공 여성이 남편에게 "오늘은 엄마와 단 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먼저 집에 가라"고 요청한 것을 남편이 묵살하고 여성과 그 어머니가 있는 장소에 불쑥 나타나 넉살을 부리는 장면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쪽을 이해하고 다른 한쪽에는 덜 이입하게 되는 이 복잡하고도 오래된 착취의 서사에서, 나는 당연히 주인공 여성을 응원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요청을 너무도 쉽게 묵살한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남편을 성토하는 댓글이 그야말로 수백개인 것을 읽고 있는데, 그 중 누군가 "가란다고 정말 가면 정 없을 것 같아요. 남편이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라는 댓글을 보았다. 그의 의견이 적절한가 아닌가를 떠나, 나는 그 순간 "정"이란 것이 "말로 하지 않는 무언가를 헤아리는 일"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란다고 정말 가냐, 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이중 메시지mixed signals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가라고 하지만 말해지지 않은 진짜 의중을 알아듣고 머물러야 정이 있는 것이다. 소통 혼선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이중 메시지에 "정"이 아주 쉽게 동원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간단한 실험을 해 보기로 했는데, 가족들이 TV를 보고 있는 거실에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정이 없네."라는 한 마디를 맥락없이 던진 것이다.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왜, 뭐 줄까?"라고 묻거나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들어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 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조차 있다. 정이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 라는. 정이 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우리가 서로 미워하며 살게 되는지 연락을 끊게 되는지 혹은 당신과 내가 그렇게 가까운 관계조차 아니어서(포털 사이트의 댓글란에서 항의와 비난의 의미로 정 떨어진다고 적은 사례를 자주 보았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지는 알려진 바 없고 말하는 본인도 모른다. 


"정"이라는 개념에 아주 실체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일 수도, 애착일 수도, 동정하는 마음일 수도, 조금 신경이 쓰이는 마음일 수도, 심지어 "없으면 빈자리를 인식하지만 있어도 별 관심을 갖지는 않는"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정이 쓰일 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는 감정은, 그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향해 무기로 쓰일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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