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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2주 과정의 한 학기짜리인 영어수업을 운영한다. 영어교육을 전공하고 여러 문화권의 여러 언어 사용자들을 가르쳐본 후에 내린, 바이링구얼리즘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을 실감할 기회가 어학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수업계획들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션 중 하나는 한국어 감정을 영어로 옮기는 수업이다. 영어 서사의 특징 때문이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참치김밥을 먹었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식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한국어 서사와 달리 영어는 "우리는 사방의 창이 모두 푸른 숲을 향해 나 있는 박사의 주방에서 마호가니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처럼 시각 정보를 중히 여긴다.
또 하나 중요한 영어 서사의 특징은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쓴다는 것인데, 한국어 사용자가 모국어로 하던 습관대로 감정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사건 중심인 서술을 하면서 영어 글을 써보려고 하면 어쩐지 어색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때문에 내가 가진 감정에 대해, 생겨났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쾌한 끝맛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 별로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이는 그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그에 맞는 언어를 찾는 것은 영어를 내 언어로 구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90분 안에 끝내기에는 너무 치열한 작업일만큼 학생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기곤 하는데, 많은 이들이 내가 "억울"이나 "서운"같은 한국어 감정을 영어로 분해해 보라고 주문하는 액티비티를 가장 좋아한다.
한국어의 감정 형용어 중 72%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우리는 "나쁜 기분"을 언어로 표현하려 애쓰는데 그 중 노출빈도가 가장 잦은 것들이 억울과 서운이다. 이를 영어의 부정적인 감정과 대응시켜 그 실체를 끝까지 찾아보고자 하는 작업을 시작하면 나는 우선 묻는다.
"억울했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슬퍼요?" 예닐곱의 학생들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sad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럼 화는 어때요? 화가 나요?" 아까보다 많은 학생들이 반응을 보인다. 나는 angry에도 동그라미를 친다.
"무서워요?" 다들 고개를 젓는다. scared는 해당사항이 없다.
"좌절스러워요? 외로워요? 모욕당한 느낌이에요?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감정들을 더한다.
슬프고, 좌절스럽고, 화가 나고, 약간은 모욕당한 것 같은 느낌, 그 외에도 사실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것, 우리가 합의하지 못한 이 거대한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인 억울함.
우리는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예매하지 못했을 때에도 억울함을 느끼고 엄마가 동생에게만 컴퓨터 게임을 허락했을 때도 억울함을 느끼고 새로 장만한 핸드폰의 배터리에 출고시부터 하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억울함을 느끼고 가족들이 다 자는 시간에 혼자 일어나 식사준비를 해야 할 때도 억울함을 느낀다. 억울함은 그저 "부당함unfairness"에 대항해 생기는 감정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게 되었다. 억울함은 모든 크고 작은 일에 남용되고 나의 별로인 기분을 가장 잘 알리는 한마디가 되었으며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나는 울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고 웃으면서 억울해할 수도 있다. 억울이 커버하는 감정의 영역은 너무도 커져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여기에 대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언어가 되었다.
억울이 얼마나 침습적인 감정이냐면 우리는 이제 남이 억울한 것에도 민감하게 되었다. 특히 나보다 지위가 낮은 누군가 나의 행동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으면 "뭐가 억울해?"라며 방어적으로 반격한다. 아동이 부정적인 감정을 호소하거나 항의하는 데 대한 일종의 벌이자 수동공격으로, 이 "억울"은 효과적으로 굴절한다. 상대의 입을 막는다.
억울은 대체 무엇일까? 억울을 종합해 보기로는 아주 여러가지의 부정적인 감정이고 개인마다 다르다. 나의 억울은 어린 시절 동생과의 대립과 그에 대한 엄마의 처결에 매우 관련이 높은 감정이었으므로 그 억울에는 질투가 깊숙히 관여하고 있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억울에 질투는 없다고 했다.
많은 이들의 억울을 쪼개보면 거기에는 말할 수 없었던 분노가 있었다. 수신자를 잃어버린 분노가. 혹은 반복되는 좌절이 있었고 소통의 단절이 있었다. 자꾸 사랑을 바치는데 더 내놓으라고만 하는 가족 구성원에 대한 오랜 원한이 있었다. 상대와 멀어져야만 해결되는 고통이 있었고 가끔은 지나친 자기연민이 상상해낸 슬픔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 "한은 한국인 고유의 정서이며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무엇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무언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부정적인 감정의 거대한 덩어리를 귀신처럼 모시고 자랑스러워하며 개인이 건강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한은 21세기 한국어에서 억울이 되었다.
이제 한국어는 바깥 언어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와 상호작용하며 진화해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은 언제나 처음엔 두렵지만 그 시기를 극복한 이들에게는 새로운 것을 만들게 해준다. 감정을 언어화하고 더 나아가 두 언어를 오가며 그 감정의 스펙트럼을 시험해 보는 것은 분명 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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