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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닐 때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모여 전체조회를 했었다. 모래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에 발을 끌며 모인 아이들은 높다란 단상에 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웅웅거리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고, 내 바로 앞의 아이들은 선생님 몰래 서로의 신발을 차며 장난을 쳤다. 눈부신 아침의 햇살이 서서히 뙤약볕이 되도록 간간이 마이크 앞에 선 어른의 얼굴만 바뀌어 가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얘기는 끝이 없었고, 가끔씩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의 열을 바로잡는다며 등을 쿡쿡 찌르며 지나갔다. "똑바로 서."하면서. 

척추에 힘을 주고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도 체육 선생님은 가끔 "똑바로 해라, 똑바로."라며 으름장을 놓고 어슬렁거리며 사라졌다. "똑바로"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온몸을 긴장시키고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 확신해도 보는 사람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똑바르지 않은 것이라서, 똑바로 선 건지 확인하려는 시선이 나에게 와서 멎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댔다. 

발을 모으고, 척추를 곧게 세우고, 팔은 가지런히 옆구리에 붙여 떨어뜨리고 가슴을 내밀고 고개는 치켜들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는 것이 똑바로 서는 것의 정의였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똑바로 선 자세의 정의는 주문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주문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아, 심지어 옆구리가 겨드랑이부터 얼마나 내려와야 끝나는지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누군가 똑바로 서라고 하면 나는 일단 머릿속이 마구 엉키는 것 같았다.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라거나 손은 주먹을 쥐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누가 매번 설명해주면 좋을 텐데 나에게 똑바로 서라는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자세를 고칠 때마다 더욱 고조되는 긴장에 만족하는 것 같아 보였다. 

십년이 지나 전문가에게 운동을 배우고 나서야 나는 바로 서다(stand straight)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발바닥에 체중을 어떻게 싣는가부터 시작해 윗배를 당겨넣고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어려운 동작이었고 온몸이 꼿꼿하게 긴장한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서는 것은 호흡을 조절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새로 짜맞추는 일종의 기술이었고 나는 배를 집어넣는 동시에 엉덩이를 너무 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똑바로 서라는 주문은 대체 뭐였을까?" 

그래, 그들은 정말 내가 바로 서기를 원하기는 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똑바로 서라는 주문은 나에게 혼란과 좌절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정신적 구금을 알리는 구호에 불과했다. 내 몸의 통제권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는 한마디였다. 지금 이 얘기를 그들이 들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시를 내리는 사람조차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일 뿐이다. 6개월 전쯤에 가르친 "차렷"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인지, 단지 상대가 자기 말에 충분히 집중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나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말과 동작의 일대일 대응은 진작에 물 건너간 얘기고, 희미한 적대감과 번개같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위계의 확인만이 남았다.

모국어가 아닌 남의 언어가, 사지를 어찌 놀릴지 알 수가 없어 땅으로 꺼질까 생각하고 있던 무력한 3차원의 나에게 내리꽂혔던 날을 기억한다. 뉴저지의 집에 혼자 앉아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여다보는 일에 질려 동네 복싱 체육관을 등록한 날이었다. 이전에도 영어로 지시사항을 들은 적이야 있지만 지금처럼 빠른 반응과 즉각적인 결과가 기대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크지 않은 체육관에서 여러 사람이 훈련하고 있을 때에는 코치가 말하는 동시에 몸이 움직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뒤에서 기어오고 있는 다음 사람의 얼굴이 내 엉덩이에 부딪힐지 몰랐다. 음악은 너무 시끄럽게 쾅쾅 울리고 숨은 턱까지 찼는데 옆에서 나를 따라오며 소리소리 지르는 코치의 말은 이해라기보단 전기신호에 가까웠다. 말을 듣고 입모양을 읽고 해석하려는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냥 팔을 뻗으라면 뻗고, 몸통을 틀라면 틀고, 구르라면 굴렀다. 그는 휙휙 퍽퍽 착착에 지시를 맡기지 않았다. "이렇게 슉"으로 모든 것을 알아채야만 하는 막막함이 없었다. 턱을, 당기고, 무릎을, 잠그고, 몸통을, 잡고 있을 것. 그 지시에만 따르면 나는 옳게 움직이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코치가 아무리 으르렁대고 귓가에 소리를 질러도 나는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내가 상대의 지시를 이해했다는 걸 이해했다. 

3차원을 즉물적으로 이해하고 거기 집착하는 언어를 보조수단으로 둔 이후로 세상을 보는 방법은 조금 달라졌다. 어제 인천공항에 도착한 친구에게 "언제 도착했냐"고 묻지 않고 "언제 날아들어왔느냐"고 물어보게 되었다. 요리 레시피를 볼 때 닭가슴살을 후라이팬에 대충 던져넣을지, 잘 눕혀놓을지, 마구 쏟을지를 세심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올리브유를 그냥 부었다고 하면 되지 굳이 방울져 떨어지게 했다고 말해야만 성이 풀리는 언어를 내 안에 받아들이며 생긴 변화였다. 

영어는 공간을 자꾸 말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했다. 아래아래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는 간명한 한국어와는 달리 영어는 자꾸 를 on이랬다가 over랬다가 above랬다가 헷갈리게 굴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up이 라고 했다. 2차원의 와 3차원의 를 구분하려고 들었다. 정확히 어떤 때 달리 쓰냐고? 그 수많은 들의 높이를, 아니 고도를 어떻게 구분하냐고? 정해진 기준이 있느냐고? 그걸 알아내는 건 이 언어를 배우는 자의 숙명이라고 했다. 유튜브 비디오가 흔한 세상에 꼭 이래야만 하냐? pull이 문짝에 붙어있으면 당기는 거지, pull over가 어쩌다 차를 세우다라는 표현이 되었는지 내가 알아야 하냐? 

호쾌하게 위인지 아래인지부터 말해놓고 정확하게 그리로 찾아들어가는 공간의 길은 옥신각신하며 합의보는 한국어가 익숙한 내게, 자꾸 공간을 쪼개고 동작을 나누려는 영어는 처음에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척, 놓고 따악, 자르면 여기 구멍이 뽀옹, 하고 생긴단 말이야, 그걸 여기 착착 끼워가지고 이렇게 휙휙휙, 됐지? 봤지? 하는 한국어의 말맛이 그리웠다. 공을 이렇게 따악, 잡고 이렇게 슈우우욱 던지면 돼요, 라고 말하는 박찬호가 LA에서 얼마나 동사와 부사의 정신 사나운 왈츠에 시달렸을지 안봐도 감이 왔다. 언어 주제에 영상을 보여주려고 하는 이 신기하고 이상하고 귀찮은 언어, 몸을 제대로 움직이는지 생각하는 것만도 충분히 정신없는데 이걸 정확한 동사와 부사로 조합하는지 자꾸 감시하려고 드는, 괴로운 언어여.

구멍난 파스타라고 하면 대강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아니 파스타에 구멍이 났으면 당연히 기다랗고 얇은 원통형의 파스타 면의 속이 비었다는 거겠지, 누가 파스타 옆면에 구멍 뚫었다고 생각하겠어?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들으란 말이야.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란 말이야. 안된다고 했다. 그 안을 달려가고 있는 구멍이 있는 파스타라고 말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 제일 정확하다고 그랬다. 나는 두손 두 발 다 들었다. 대강 할 생각이 없구나. 그래 알겠어. 그러면 나도 세상을 좀 더 삼차원으로 봐야겠구나. 밀가루 반죽에 구멍을 뽕 내세요 라고 말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손가락을 찔러넣어 통과시키세요, 라고 말해야겠구나. 와, 미치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미칠 것 같은 시기가 지나고 나니 권투 도장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선명함이 찾아왔다. 흔한 도면 하나, 동영상 하나를 찾아보지 않고 오로지 글로만 이루어진 지시사항으로 음식을 만들고 병뚜껑을 따기도 했다. 나중에는 서랍을 그냥 집어넣는다고 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들여보낸다고 말하게 되었다. 머릿속에 사물의 지도를 이미 그리고 언어가 그 궤적을 따라가도록 했다. 밤새 춤을 추는 일이 어째서 춤으로 밤을 떠나보내는 일인지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냥 주방에 갔다고 하지 않고 굳이 주방에 발걸음을 들어놓았다고 말하게 되었다. 당연히 기어가거나 날아가지 않고 걸어갔으니 발을 들여놓았을 테고 그러니 정확한 의사 전달이라기보다는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간과 동작을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하는 언어의 조바심을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없는 우리가 가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엿보는 일이 귀신과 외계인을 목격하는 거라면, 다른 세계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초월의 가장 먼 영역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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