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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혹은 썸이라도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슴 철렁하는 순간을 알 것이다. 이유 없이 문자 간격이 벌어지고, 메시지를 읽고도 답신이 없거나 영혼 없는 "ㅎㅎㅎ"만 날아오는 일이 많아지고,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하는 일이 생긴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아니야, 요즘 회사가 바쁘다잖아? 마감이 코앞이라잖아?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많이 부었다잖아? 내 기분 탓일거야. 

그러나 슬프게도 문자 간격은 더욱더 벌어져 기다리다 지친 내가 전화를 하는 지경이 되고, "ㅎㅎㅎ"조차 반갑고, 한 번 미루었던 약속에 대해 언제 다시 얘기를 꺼낼까 가슴 졸이며 기다려도 말이 없다. 그렇게 결국 연락이 끊긴다. 

이런 식으로 이별을 겪는 건 여러 이유로 최악의 경험이다. 관계를 종합하고 애도할 만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간 상황을 좋게 해석하려고 낭비한 에너지와 시간을 생각하면 약이 오르고 화가 난다는 점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슬슬 떠밀려 문 밖으로 쫓겨난 기분이 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한거야? 다른 사람이 생긴 거야? 이제 와서 내가 정색을 하고 달려가 따지면 나를 또라이 취급할 거야?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수없는 질문들이 생겨나고 순간순간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날 우습게 보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멱살을 잡고 끌어내서 한마디라도 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안의 마지막 자존심이, 당장이라도 신발을 꿰어 신고 달려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런 식으로 멀어지는 일을 영어로 pull away라고 한다. walk away(걷다 + 멀어지다)도 아닌, drive away(몰다 + 멀어지다)도 아닌 pull away(당기다 + 멀어지다)다. 이런 이별을 콕 집어 표현할 때 쓴다. 구글에 pull away를 이미지 검색하면 온통 멀어져가는 여자, 고뇌하는 남자, 억지로 상대를 잡아두려고 팔꿈치를 붙잡고 늘어지는 슬픈 사람의 실루엣이 뜬다. 떳떳하게 안녕을 말하고 돌아서서 가기보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떨군 채로 상대의 애정에 답하지 않는 식의 이미지들이 수십 개 수백 개 검색된다.

왜 그냥 떠난다고 하지 않는 걸까? 당기면서 멀어진다는 걸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대답은 pull에 있다. 우리가 흔히 무거운 유리문을 여닫을 때 보는 "당기시오" 때문에 pull이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당기는 행위만을 지칭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pull은 어느 방향이든 끌어당기는 모든 동작에 사용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pulling은 만유인력이다. 지구는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인다(gravitational pull). 안쪽으로, 안쪽으로.

그럼 바깥쪽(out)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가능할까? 물론 된다. 끌어들이는 대상이 안쪽에 있다면 내가 바깥쪽으로 나서면 된다. 그러면 pull out이 된다. 서랍 안에 들어있는 펜을 꺼내려고 손잡이를 잡고 당긴다. 서랍은 나의 당기는 힘에 의해 딸려나온다.

중고나라에서 며칠간 열심히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상세 사진도 보여주고 가격 흥정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구매자가 발을 빼려고 한다. 밖에서 누가 뒷통수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얼굴은 이쪽을 향한 채로, 앗차 죄송합니다, 아이구 이거 갑자기 제가 사정이 생겨서, 라며 거래 바깥으로 내뺀다. pull out이다.


다시 우리의 무책임한 연인에게로 돌아가자. 그는 아직 나를 보고 있기는 하다. 몸의 방향이 이쪽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마치 지구가 저기 저편에서 자기를 부르고 있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듯이, 누가 뒤에서 옷깃을 잡아끌고 있지만 아직 홱 뒤돌아서기는 곤란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멀어지고 있다. 

그의 눈코입이 아직 보인다. 앗, 입을 달싹거리며 무어라 말하는 듯도 하다. 아, 사라졌다.


이런 식의 이별은 기분이 더럽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등을 보일 용기가 없었던 그 사람이 아직도 무언가에 덜미를 잡혀 끌려다닐 거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이별을 말하지도(say goodbye) 않았고, 관계를 두고 확실히 떠나지도(walk away) 않았고, 그저 무언가에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간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멀어져갔다. 그런 종류의 인력은 지속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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