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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면으로 만든 모든 음식을 좋아한다. 인스턴트 라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만 파는 쑥갓을 많이 넣은 우동, 호로록 마셔버릴 수 있는 가늘고 매끈한 면발의 멸치국수, 그리고 포크로 돌돌 감아 입 안에 넣을 때 코로 향이 훅 끼치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까지. 8분간 잘 삶은 알덴테가 아니어도 된다. 아니 오히려 물을 넉넉하게 넣고 좀 불다시피 끊인 너구리 면발이 제일 좋다. 아무렇게나 요리했건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그래도 라면 아닌, 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을 땐 우선 레시피 비디오부터 검색한다. 어차피 결국 마트에서 금방 집어올 수 있는 재료만 들어가고 30분 이내에 조리 가능한 레시피를 고르겠지만 눈이 즐길 수 있는 성찬은 공짜니까. 

그렇게 화려하고 이국적인, 보글보글 끓고 냄비 속으로 휙휙 들어가고, 심지어 도마 위에서 땋아져내려가는 면발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영어로 요리하는 채널을 보며 군침을 삼키고 있곤 한다. 영어의 레시피는 한국어보다 설명을 많이 하고 동사를 자주 쓰는 경향을 보이는데, 한번은 속에 구멍이 난 스파게티면인 부카티니Bucatini를 소개하며 미국인 셰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 파스타면은 그 안을 달려가는 구멍이 나 있어요.(It has a hole running through in it.)" 

한국어로는 그냥 "구멍 있는 스파게티" 혹은 "안이 뚫린 파스타"라고 말하면 척 알아들을 것을, 영어는 듣는 내게 파스타 면 안의 구멍을 순식간에 슉 들여다보는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열일한다, 동사와 부사의 조립에 집착하는 언어여.

 굳이 그렇게까지 묘사할 필요 있을까 싶다가도, 일종의 언어적 움짤을 만들어내는 재치에는 매번 놀라게 된다. 화자가 뭘 말하고 있는지 정말 멀리까지 따라갈 수 있다. 그 파스타, 보여주지 않아도 본 것 같다. 어차피 비디오로 봤지만.


그리고 부카티니는 역시 마트에서 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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