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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읽기

feeling forced & rushed

RomiT 2019. 6. 25. 14:22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가까운 바에 뛰어 들어가서 위스키 샷을 급하게 주문한 참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남자친구는 이미 자기 친구들과 근처 술집에 자리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퇴근해 홍대에 막 도착했지만 바로 약속장소로 갈 수 없었다. 어쩐지 맨정신으로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마음 깊이 알고는 있었지만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이름을 댈 수 없었다.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지 2주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우리는 온라인 데이팅을 통해 만났고 그는 나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원래는 이른 저녁에 만나 커피만 마시고 헤어지려고 했었다. 첫만남을 질질 끌어봐야 어색해지거나 시간낭비가 되기 쉬우니 산뜻하게 털고 일어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상냥하고 매너 좋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그가 나도 마음에 들어 에라 모르겠다 손을 잡고 이태원 밤거리를 자정까지 쏘다녔다. 수많은 데이트와 가능성 사이에서 헤매 다니다, 그렇게 충분히 기다린 후에 만나는 운명적인 상대에 대해 누군가 얘기하면 냉소적인 척하며 그러나 아직은 귀를 기울이던 시절이었다. 세상이 무섭기만 한 곳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신나는 일이 아직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그렇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매일 파티하는 것처럼 살자고 마음먹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는 만난지 일주일만에 나에게 시를 적어 주었다. 소나기가 내린 저녁 퇴근 후에 만나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주는 진지한 얼굴을 보는 일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간지럽고 신나는 일이었다. 물웅덩이를 피해 신중히 이끄는 손을 따라 걷는 걸음이, 산뜻한 공기가, 무언가 중요한 일이 시작되었다는 예감이 한껏 나를 들뜨게 했다.

매일 보고 싶은데 내가 너무 늦게 퇴근한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창 좋을 때인데, 둘 다 서로 첫눈에 반했는데 당연히 이래야지. 만난지 일주일만에 사랑을 입에 올리고 벅찬 마음을 시로 적어주고 서로의 친구들에게 서로를 소개시켜 주자고 하는, 자연스럽고 참을 수 없는 불타는 로맨스. 

하지만 나는 처음 와보는 바에 들이닥쳐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위스키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도착하니까 금방 갈게, 좀 이따 봐, 라고 하트를 뿅뿅 메시지로 날리면서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아직 작은 이층 바에 손님들이 차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반갑게 주방에서 나와준 바텐더가 편히 앉으라고 했지만 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서두르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만난지 얼마 안된 남자친구가 자기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고 해서 만나러 간다, 그런데 왠지 너무 긴장되어서 맨정신으로 갈 수가 없어 술 마시러 왔다, 독주를 한입에 털어넣고 빨리 뛰어갈 거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 뭐라 말하려다 말았다. 

we all need something to look forward to. 사람들은 모두 고대하고 기다릴 만한 일에 대어 살아간다. 반가운 얼굴이 하루의 끝에 가져다주는 행복을 기다리고 마침내 도착할 그 택배 문자를 기다린다. 치앙마이로 떠나는 그 티켓을 회사 화장실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꺼내본다. 누군가에게는 야근이 끝난 뒤 드디어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어던지는 순간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일년에 단 한 번 돌아오는 그 뮤직 페스티벌에서 입장팔찌를 손목에 두르는 순간일 것이다. 

작은 성취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일이 드물고 언제나 내일 할 일이 더 많은 하루하루를 살며 나에게 가장 쉬웠던 "일상의 기쁨"은, 애정을 마음껏 갈구해도 되는 상대를 찾는 이었다. 새로운 연애의 시작이었다. 썸을 타든, 여친 남친 못박고 배타적 관계를 시작하든 그 로맨스의 가능성이야말로 하나의 인간이 나에게 주는 승인이었으며 면접 합격 통지이기도 했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 시작되는 우주의 충돌, 그 가능성의 시작만큼 내가 사랑한 것도 드물었다. 누군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관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그런 관계(왜냐면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너무 힘듦므로), 이 다음 "설렘"이 어디서 올지를 정확히 가리켜줄, 주말에 뭘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게 해줄 그런 관계, 연애.

해피 엔딩은 없다. 우리의 머물렀던 관계의 끝이 씁쓸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는 죽어야 끝나기 때문이다. 인생은 시즌제가 아니고 죽었던 캐릭터가 살아 돌아오지도 않는다. 드라마와 인생을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조금씩 죽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인스타적 순간"을 갈망하며 내민 손을 잡은 순간이 없었다고도 말 못한다. 사람들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다수의 눈길이 닿은 곳에 머무는 안정감이 좋아서 한 결정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스스로도 다 모르는 일이다.

여자가 꼭 남자를 만날 필요는 없다. 남자가 여자를 만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만나서 사랑에 빠질 필요도 없다. 냉소적으로, 배신당한 기분으로 구남친에게 빌려준 돈 못 받은 것처럼 체념하듯 혹은 원한을 담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한 글자에도 다른 뜻이 없이, 우리에게는 무엇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매력적이라 느끼는 두 젊은 사람이 만나 왠지 끌려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서로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빨리 한 팀이 되어 어딘가로 돌진해야 할 것 같은 그런 조급함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러티브와 에너지가 나와 나의 세계의 아주 많은 부분을 장악하고 조종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랑은 아주 좋은 것이고 모든 걸 바꿀 수 있다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른다는 것, 나도 당시의 남자친구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날 바로 약속장소로 가지 못하고 먼저 취했어야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나의 마음은 항상 위험신호를 찾기 위해 분주했고, 그러면서도 위험신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빨리 내고 싶었고, 항상 팔을 벌리고 거기 그립게 서 있는 로맨스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안락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욕망마저 내가 가진 게 아닐지 몰랐다. 수많은 영화와 책에서 본 게 맞다면 나는 행복해야 하는데,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했어야 하는데, 그저 떠밀려가는 기분이 들 뿐이었다. 제정신으로 대면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면 나는 그 바에서 바로 집으로 뛰어갔을 것이다. 남자친구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 친구들이 만나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 관계가 너무 빨리 진전된다는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그것도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연애는 약 한달간 지속되었다. 남자친구가 곧 자기가 살던 이모댁에서 나와 집을 구할테니 같이 살자고 말하고 나서였다. 더이상은 괜찮은 척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안 괜찮았다. 보이지 않는 팔들이 나를 붙잡고 뛰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올해 여름에는 그 바에 다시 가 봐야겠다. 바텐더가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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