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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마음에 든 영화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다큐멘터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진지하고 어두운 영화들로, 그 이야기들이 하나의 통일된, 정돈된 감정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나를 질문하게 하는 점을 좋아한다. "호텔 르완다"가 그런 영화였다. 얼마 전에 그 영화에 대한 세부 사항이 기억이 나지 않아 검색하다가 그 영화를 "감동실화"라고 소개하는 블로그를 보았다.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감동실화"? 


호텔 르완다(Hotel Rwanda)는 벨기에가 아프리카의 소국 르완다를 점령해서 분할통치하다가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내전으로 치닫는 것을 모르는 척 떠나버린 데부터 시작되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1994년 4월에 시작되어 약 4개월간 지속되었으며 르완다 시민이 많게는 100만명까지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되는, 현대사의 가장 끔찍한 기억 중 하나이다. 영화는 이 피비린내 나는 도륙의 가운데서, 국제 구호 활동가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르완다 시민이었던 호텔 매니저가 목숨을 걸고 1268명을 구해낸 이야기를 다룬다. 

나는 이 영화를 대학교 학부 시절에 처음 접했다. 국제정치학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보여주신 호텔 르완다를 보고 경악에 휩싸여 며칠이고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5센트짜리 도축용 칼로 사람들이 난도질당할 위기에 놓였는데 백인들은 떠나고 있다!"는 주인공의 절규를 잊을 수 없었다. 처참한 내전을 겪었던 국가의 후대 시민으로서, 그리고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를 항상 궁금해하는 동료 인간으로서 "무엇이 문제였고 막을 수 있었다면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에 주목했었다.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이 시민 영웅이며, 그가 동료 시민들을 구출해낸 이야기가 매우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무차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강인함과 그들을 구한 사람의 고귀함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는 아직 사랑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호소한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실화"에서 감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정서였을까? 슬프다는 뜻일까? 희망적이라는 뜻일까? 비극적이라는 뜻일까? 교훈을 남긴다는 뜻일까? 보기에 즐겁다는 뜻일까?왜 나는, "감동 실화"라는 그 간단한 소개에 반감을 느꼈을까?

종잡을 수 없는 "감동"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임"이라 되어 있었다. 한영사전을 찾아보았더니 

1. be moved

2. be impressed 

3. feel emotion

으로 번역되어 있다. 모두 "뭔가 느낌"을 묘사할 뿐이지 감정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번은 그저 "마음이 움직임"이고 2번도 "(무언가) 인상이 깊음"이다. 게다가 3번은 말 그대로 :"감정을 느낌"이다. 어떤 영화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는 건 그냥 "그 작품을 접하고 (불특정한)감정을 느꼈다"는 말일 뿐이라는 거다. 


"감동"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감동적인 영화"를 검색해 보았더니 그야말로 액션과 호러 장르를 빼고는 모두 감동적인 영화에 해당되는 것 같았다. 감동적인 동물 영화,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죽다 살아난 감동실화...

여기서 감동적인 동물 영화는 동물이 죽거나 착취당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감동이었고, 주인공이 죽거나 실의에 빠지는 내용이지만 어쨌든 사랑에 감동적인 영화였으며, 납치당한 자녀를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한 이야기도 엄마의 감동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감동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이 그 단어를 널리 사용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의심을 확인해보기 위해 나는 트위터에 간단한 설문조사를 올렸다. 

"감동적인 영화"라는 광고를 보면 해당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1. 슬픔

2. 기쁨

3. 좌절

4. 셋 중 아무거나




나는 감동이 일단 누군가를 눈물 흘리게 해야 한다는 가정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슬픔이 답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리라 예상했었는데, 놀랍게도 슬픔은 24시간 동안 참여해준 525명 중 43%의 표밖에 얻지 못했다. 기쁨이 두번째로 많은 표를 얻어 24%였고, 그 바로 뒤를 바짝 쫓아 "셋 중 아무거나"가 22%를 차지했다.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어떤 감정을 느낄 거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들이 5명 중 하나라는 이야기였다. 

올해 초 동계올림픽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막을 내린 가운데, 곧이어 시작한 장애인 동계올림픽에는 방송사의 관심이 덜해 사람들이 중계를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한 신문사의 칼럼은 "패럴림픽 중계는 국민의 '감동권' 문제다"라며 더 많은 중계를 요구했다. 이 글의 말미에는 "장애인 선수가 경기 후 환하게 웃는 모습은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감동을 일으킨다."는 대목이 있다. 패럴림픽 중계는 더 많이, 자주 편성되어야 한다. 그 부분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감동"이다. 감동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제 불특정 다수가 감동을 느낄 권리에 대해 말하는 이까지 생기는 것일까? 맥락을 분석하면 "to be inspired", 즉 다른 사람의 성취를 보고 영감을 받아 일종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감동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러면 "남에게 영감을 받을 권리"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일까? 애초에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감동을 좀 받고 싶다"가 아닌, "영감을 얻고 싶다"는 구체적인 요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런 요구가 정당한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더 쉽지 않았을까?

이에 더해, 이런 식으로 "그것은 참 감동적이었다."고 우리의 감상 혹은 정서를 갈음하는 언어의 습관이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듣고 처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을까? 

감동은 한국어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슬플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고, 좌절할 때도 있지만 또 어떤 감정이든 "뭔가 강렬하게 느껴지기만 한다면"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 실컷 울고 나서 느끼는, 머리와 코가 얼얼한 느낌, 감정이 기승전결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나서 그게 전부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는 안도감.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고 이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도, 더 생각해볼 만한 미진한 감정을 남긴다 해도 그걸 전부 "참 감동적이었다"고 깃털처럼 상쾌하게 정리하는 인식의 습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감동이라는 개념이 기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같은 사건을 목격해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모두 다를 수 있다고 한다. 하물며 어떻게 느끼는가는 당연히 모두 다를 것이다. 감동은 여러 감정을 아우르고 한데 묶는 동시에 "여기에 뭔가 네가 좋아할 만한 것이 있다"는 강력한 표지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언어이다. 그러나 동시에 감동은, 우리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감동했다고, 어떤 사건이 감동적이었다고, 그래서 참 "좋았다"고 느낄 때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더이상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사실 그 감정은 그냥 감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했어야 할 감사와 사랑의 말을 대가 암호화한 것일 수도 있고, 스크린에서 다들 울길래 따라 운 것 뿐 내가 뭘 느꼈는지 확신하지 못한 와중에 한 아무말일 수도 있다. 


"감동"이라는 말이 자리한 곳에 가끔 질문해 보자. 그래서 난, 대체 무엇이 감동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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