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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언니의 결혼식 바로 다음날에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출발해 푸켓에 먼저 도착하게 될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짐을 끌고 아직 캐시와 켈리 빼곤 모두가 잠들어 있는 논현동 에어비앤비를 빠져나왔다. 도중에 현금을 뽑느라 atm이 문을 여는 7시까지 시간을 보내야 했고 덕분에 공항버스는 30분이 넘게 월요일 아침 교통체증 안에 갇혀 있었다. 역삼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강남의 오만 데를 다 찍고 나서야 동작쯤에 진입했고 작년 9월 이후로 한번도 조선 밖에 못 나갔던 나는 그야말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빨리 나 공항으로 보내줘. 더는 1분도 못 참아. 한국어로 된 모든 음성신호와 미세먼지 때문에 회색으로 흐려진 하늘, 씨발을 연발하는 20대 초반 남자애들 중 어느 것도 더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전날 언니의 결혼식 애프터 파티에서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 더 agitated되었던 것 같다. 공항 터미널에서 육천오백원짜리 김치찌개를 다 비우고 났더니 약간 정신이 차려졌으니까.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바로 새 학기가 시작될 거였다. 나는 게이트 앞에 앉아 신학기에 등록한 학생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입력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고 아직도 숙취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상태였지만 안간힘을 짜내 이메일 답장도 모두 하고서 나는 탑승하려는 승객들 사이에 섰다.



태국의 첫인상은 덥고 물빠진 듯한 색채라는 거였다. 방콕 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는 동안 맛깔나게 화려한 타이 음식도, 들뜬 관광객들도 보지 못했다. 중국인들이 넓은 홀에 아이들을 풀어놓았다가 느긋하게 다시 데려가곤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 전자렌지에 데워주는 돼지고기 찐빵을 하나 먹었을 뿐이었다.

푸켓 공항을 나서자마자 택시 승객을 찾는 액센트 강한 영어가 터져나왔고 나는 발리의 응우라이 공항을 다시 생각했다. 여기가 발리였으면 얼마나 좋아. 부오빠가 알려준 대로 택시비는 700에서 1000밧(300밧이 약 10달러)을 넘지 않는 가격이었고 나는 흥정 없이 바로 800밧을 주고 택시를 잡았다. 히잡을 쓴, 10대인지 성인 여성인지 가늠할 수 없는 팽팽하고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가 더듬더듬 단어만 겨우 연발하는 영어로 내게 호텔로 가는 지도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도중에 기름을 넣으러 주유소에 들르고 앞유리를 닦을 때도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붙일까봐 좀 겁내하는 것 같아 나도 조용히 있었다. 어쨌든 여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 건 안심되는 일이었고 나도 많이 피곤했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 파통 비치에 도착했다. 짐을 부려놓자마자 창가로 달려가 목을 빼고 바다가 보이는 야경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실루엣의 야자수와 피부에 와닿는 더운 공기는 여기가 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는 했지만 색 매치가 중구난방인 네온사인과 알전구들이 해변을 따라 쭉 늘어선 모습은 광안리나 서해안 같은 한국 바다를 연상케 해서, 나는 좀 실망했다.

호텔에 도착한 때가 저녁 9시였고 다른 일행들은 모두 11시에나 공항에 도착할 거였다. 밤하늘을 가로질러, 피곤한 얼굴을 맞대고 졸면서 오고 있겠지. 나만 빼고 모두 거주지가 한국이 아니어서, 더 정확히는 미국인들이어서 푸켓으로 떠나오는 날까지 알뜰히 쇼핑과 관광에 쓰고 싶어했다. 저녁 비행기를 타기 전에 코엑스와 명동을 들렀다는, 그러고도 뭘 다 못 샀다며 아쉬워하는 내 친구들은 지금쯤 기내에서 간식쯤을 받았겠다 생각해 보았다.

저녁을 대강 때워 혼자라도 뭘 먹어볼까 하고 호텔 앞 편의점에 갔는데, 뭘 사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다들 우르르 도착한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였고, 한국에서도 숙소 바로 앞 세븐일레븐에서 그 어디에서보다 즐거운 쇼핑을 했던 우리는 다같이 편의점에서 신기해 보이는 말린 과일과 태국 컵라면 등을 집어들었다. 당연히 맥주를 좀 사올 생각이었는데 태국에선 술을 정해진 시간에만 팔고 그 외엔 살 수 없다고 했다. 자정은 술을 안 파는 시간이었다. 다들 한 방의 거실에 모여 말린 망고와 바나나를 좀 먹었고, 서둘러 각자의 침대로 흩어졌다. 내일은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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