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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만난 리트리버 아가.


정오가 지나 해는 높이 떠올랐고 맥주는 빨리 사라졌다. 공기 속에는 열대의 더위와 사람들이 물장구 치는 소리와 웃음 섞인 날카로운 비명이 섞여 떠돌았고 나는 반쯤 취한 채로 우리 자리와 스무 걸음쯤 되는 바를 부지런히 왕복하며 칵테일을 새로 날랐다.

수영복을 갈아입고 해변 모래톱으로 걸어들어오자마자 자리 잡을 생각 없이 절벽 저쪽으로 사라졌던 닐과 미셸, 부오빠와 다오가 돌아와서 우리가 잡은 카바나를 살피고는 바의 그늘로 몸을 피했다. 미셸은 남아서 여자 넷이 함께 girl group pic을 찍었다. 아까의 해변 관리인은 부탁하기도 전에 달려와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었고 어마어마하게 큰 사마귀가 어디선가 날아와 카바나 정중앙에 착지하는 바람에 모두가 펄쩍 뛰어 일어나기도 했다. 

지난 겨울 춥고 고립된 마음이 누적되어 힘들게 버티다 드디어 여기 왔는데, 나는 좀 더 무뎌지고 신나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안전한 와중에 천국이라는 이름의 해변에 와 있는데, 지금 안 취하면 다른 때 취할 이유도 없었다. 코코넛 한통을 그대로 주는 술은 없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해서, 코코넛 쥬스와 럼 샷 하나를 따로 주문해 코코넛 열매 안에 부었다. 우산과 꽃도 꽂아달라고 했다. 하늘은 푸르고, 물빛은 그야말로 에메랄드색으로 빛나고, 코코넛이 잘 보이게 무릎 위에 두고는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고 더위에 약간 숨이 막힌 듯 웃고 있는 우리가 영원히 사진으로 남았다.


기온이 섭씨 35도에 육박하는 해변에서 할 일은 지상에서 땀 흘리며 구워지다가 못 견딜 지경이 되면 바다에 뛰어들어 체온을 내리고 지치면 다시 모래톱으로 기어올라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우리도 몇몇씩 그룹을 지어 물에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반복했는데, 캐시가 가져온 긴 담요 모양의 튜브에 매달려 물장구를 치고 있다가 닐이 물 속에서 성게를 밟아 발바닥을 다쳤다는 말을 듣고 다들 뛰쳐나온 것이 오후 두시쯤이었다. 


"많이 아파?" "병원 가야 하지 않을까?" "걸을 수 있어?" "앰뷸런스 불러야 하나?" 하며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태국 경험이 많은 다오와 부오빠는 "염려는 되지만 의사를 만날 것까진 없는 경우가 많다, 쉬면 낫는다"는 의견이었고 나머지는 너무도 선명하게 점점이 찍힌,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사람의 바깥피부 안쪽까지를 분명 관통한 걸로 보이는 검붉은 색의 가시가 끔찍하게 느껴져서 역시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영복 바깥에 대강 반바지만 꿰어입고는 해변에서 주자창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낑겨타는데, 이미 타 있던 유럽인들이 매우 티나게 인상을 썼다. 환자는 겨우 앉히고 나머지 우리 일행은 위험하지만 모두 서 있었고 나와 부오빠는 그나마 계단에 매달려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캐시가 "이렇게 돌아가야 할 줄 몰랐네"라고 하자 유럽인들 중 누군가가 "그러게, 나도 몰랐네"라고 했다. 닐이 발을 절며 차에 오르는 걸 봤으면서도. 발리에서도 느꼈지만 동남아시아의 섬에서 마주치는 백인들 중에는 불쾌하고 무례한 자들이 많다. 한마디 하려다 관뒀다. 


주차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빌린 차로 갈아타 푸켓 시내의 작은 클리닉을 찾아갔다. 다운타운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발리의 꾸따 시내와 아주 비슷했다. 2차선도 채 안되어 보이는 좁은 도로와 오렌지, 분홍, 흰색, 초록, 황금색의 물결. 색깔과 향, 가솔린 냄새, 음식 냄새, 차창에 손자국을 내면서 쳐다보게 만드는 무심한 화려함.

닐은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 했고 우리는 잔뜩 걱정이 되어 1층짜리 통유리 건물인 작은 병원 앞에 삼삼오오 모여 섰다. 대기실이 너무 작아 우리가 전부 들어갈 수 없었지만 깨끗해 보였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 미셸만 남아 남편을 지켜보기로 하고 우리는 다음 숙소인 Surin 해변의 빌라로 이동했다. 

한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새 숙소는 산비탈 중간에 자리잡은, 차단기와 경비실이 주택단지 입구에서 진입하는 자량을 검문하는 프라이빗한 주택단지였다. 우리는 닐의 아픈 발바닥도 잊고 들떠서 환호성을 울리며 말 그대로 빌라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산의 경사를 이용해 3층 모두가 바다를 면하게 만들어진 빌라의 한 동을 통채로 빌린 것으로, 방이 5개여서 커플 둘과 싱글여성 세 명이 모두 각자의 방을 가질 수 있게 될 거였다. 


현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탁 트인 바다 조망의 테라스가 펼쳐지고, 정면에는 꽤 깊은, 물과 바다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인피니티 풀이 있었다. 테라스의 양 옆에는 선베드 여럿과 빌트인 소파가 놓여서 이미 누군가 거기서 샴페인을 따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했다. 7인의 친구가 여름나라에서 일주일을 보낸다면 어떤 집에서 지내고 싶어? 라고 누군가 물어봤을 때 내가 상상했을 바로 그런 집이었다.


빌라의 수영장 위에 드론을 띄워서 생긴 물결.


테라스로 나가기 전의 넓은 거실은 뒤쪽에 대리석 홈바가 딸린 주방이 있었고(다들 이 주방을 써보고 싶어했다) 식탁이 놓인, 거실의 오른쪽 날개인 공간 외에도 소파와 커피 테이블이 있는 왼쪽 날개는 정말 넓어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으면 목소리를 높여야만 대화가 가능한 정도였다.

그 외에도 건물 안팎으로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한참을 살피고 나서야 몇 개인지 모두 파악이 된 침실은 모두 형태가 달랐다. 전부 샤워와 화장실은 딸려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좋은 방과 덜 좋은 방이 있어서 어디 짐을 풀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벌써 곤란했다.

맨 꼭대기의 엄청난 마스터 스위트룸은 결혼한 커플에게 주기로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었기는 했지만 아직 닐과 미셸이 없는 상태여서 방을 정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결국 이 때 샤워를 위해 자기 짐을 내려놓은 방이 자기 방이 되었고, 켈리는 서재를 통과해 바깥으로 나가야만 갈 수 있는 제일 아랫층 방을 쓰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방이 몇 개인지 헷갈린데다 좀 들뜬 상태여서 켈리 방보다는 훨씬 나은(바다 뷰는 아니지만 켈리처럼 격리된 형태는 아닌) 내 방에 대해 불평 비슷한 말을 한 것 때문에 며칠간을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렸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쨌든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응급처치를 받고 기분이 훨씬 나아진 닐과 미셸을 픽업했고, 미셸은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닥터피시 체험을 하고는 너무너무 징그럽고 이상한 느낌이었다며 모두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뉴욕에서였으면 누가 나한테 50불 줬어도 안해!" 

발바닥을 다쳐 이제 물에 들어갈 수도 없고 금주 명령도 받은(결국 물에도 들어가고 술도 마심) 닐은 자기의 무용담을 페이스북에 올려 이미 라이크를 여러개 받은 후였다. "닐 vs. 성게"였는데 성게는 1점을 올리고 자기는 0점이라며 앞으로 성게알을 열심히 먹어서 복수하겠노라고, 병원에서 자기가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흥분해서 설명했다. 

닐 성게에게 1패

천진한 뉴욕 커플 덕에,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다소 맥이 빠진 모두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 저녁을 먹으러 갈 시간이었다. 부오빠와 다오는 태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night market을 체험하게 해주겠노라고, 여기서 태국 음식 먹으면 이제 다른 어디서도 태국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며 바람을 잡았다. 둘이 뺵빽하게 작성해온 여행계획서에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여럿이라 우리도 기대에 부풀었다. 여태 태국에서 먹었던 음식이라곤 편의점 과일 말랭이와 호텔 조식 뷔페가 다였다. 이제 진짜 태국 음식을 먹게 될 거였다. 그 맛있고 화려하고 향기롭고 게다가 싸기까지 하다는 타이 푸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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