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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be

보통의 퇴보

RomiT 2019. 3. 8. 13:29

인간은 퇴보할까? 퇴보한다. 권력에 눈이 멀거나 노쇠로 인한 사고의 둔화 같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의 퇴보가 일어난다. 

A라는 총명한 인간이 있다. 그는 월반을 하거나 학점을 전부 A 받거나 이름이 크게 나거나 박사학위를 일찍 따거나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선망하거나 질투해 미워하거나 그 둘을 동시에 하며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바쁘게 길 가는 그를 불러세워 자질구레한 질문을 하든지 별것도 아닌 그의 필기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역시 영재의 물건은 이래서 다르다며 헛소리하는 식이다. 

총명한 인간은 보통 이런 식의 관심을 못마땅해한다. 그저 귀찮은 게 아니라 바람직하지가 않다. 그는 자신이 천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천재를 망치는 빠른 길 중 하나가 그의 업적 몇 개를 가지고 수선 떠는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둘러싼 소음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걸 별 일로 여기거나 자기의 본질로 여기는 순간 자기가 가진 건 그게 전부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이건 그렇게 대단히 여길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뿐이다. 애써 신나는 마음을 누르며 겸손을 떠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얕보면서 기만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인 것이다. 바깥세상은 다소 실망한다. 셜록 홈즈가 그렇듯이 날카롭고 선명한 짜증이라도 터져나오길 기대했다. 아무튼 뭔가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총명한 인간도 느낀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천재 연기를 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시간이 흘러 총명한 자에게도 나머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인생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에게도 애초에 엄청난 야망은 없었다. 그는 총명한 인간이었고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그에게도 삶이 일어나 그는 연애를 하고, 어쩌면 임신을 하고, 어쩌면 스타트업을 차리고, 연구소에 취업을 하고, 어쩌면 아무도 안 읽어주는 책을 쓰고, 어쩌면 부모가 차려준 카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재혼을 하거나 천식이 있는 강아지 전용 샴푸로 특허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총명한 자는 자기가 총명한 자였다는 걸 기억해 낸다. 한때 자기가 소름 끼쳐하며 밀어내던 천재 소리를 그리워한다. 이제 아무도 나를 인터뷰하러 오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고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불덩이를 느낀다. 

그는 동문회에서 온 이메일을 찾아본다. 내가 예전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잠깐, 그랬나?), 얼마나 장래가 촉망되고 미래가 밝은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그렇기까지?). 뒤에서 쫓아오던 발자국 소리를 생각한다(그때는 그것만큼 싫은 게 없었는데).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를 신중히 생각한다.

누가 따라와서 안 들어도 될 소리를 할까봐 헤드폰을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을 치던 나의 초조함과 스스로의 숨소리가 십 년 이십년의 시간을 건너와 갑자기 그리운 추억이 되고 아쉬울 것 없었던 잘 나가던 시절, 나의 황금기가 된다. 나는 그것이 보통의 인간이 퇴보하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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