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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너무 뻔하다고, 반복되고 지루하다고 불평한다. 세상의 모든 유명한 로맨스는 여자가 왕자님을 만나는 이야기라며 경멸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로맨스는 분명 변했다. 맨하탄 한복판에서 몸을 팔던 여자가 젠틀하고 부유한 사업가를 만나 메이크오버(드레스와 유리구두, 호박마차를 연상케 하는)를 거친 후 약간의 역경(유리구두를 떨어뜨리고 성을 탈출)을 거쳐 결국 그의 성으로 떠나게 되는 해피엔딩이 불과 1990작인 프리티 우먼이라면, 2천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여자가 재투성이 아가씨이거나 성판매자는 아니게 된다. 주인공 여성들은 이제 섹스 칼럼을 쓰거나, 여행사에 근무하거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거나 혹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의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가 있으며 가끔 고양이도 키우고 자전거도 타고 차도 몬다. 이 독립적인 여성은 보통 수입에 비해 좀 버겁지 않나 싶은, 철저한 계산 하에 귀여울 정도로만 어질러져 있는 아파트에 산다. 아침에는 공원을 뛰거나 스피닝 클래스에서 땀을 빼거나 요가를 한다. 혹은 이렇게 철저히 미국식으로 자신을 가꾸진 않더라도, 일본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알바를 열심히 하고 쿠폰을 모아 장을 본다. 자기 삶을 자기가 돌볼 능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 여성 캐릭터가 철저히 무직이거나 집에서 거동을 못하거나 돈 많은 백수인 경우는 없거나 매우,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이런 여성 캐릭터의 혁신적인 진화는 과연 겉모습만큼 달라진 본질을 담보할까? 그들은 여전히 친구들에 의해 무도회에 끌려간다. 여성 캐릭터의 조력자 역할인 동성 친구(요즘은 가끔 게이 친구이기도 하다)들이 그에게 끊임없이 "너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or 지난 사람은 새 사람으로 잊혀진다 or  가끔은 힘 빼고 놀 줄도 알아야 한다 or 소개팅 대타를 뛰어다오" 등등의 이유로 클럽에 데려가거나 남자 만나는 자리에 앉혀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현대 여성은 반드시 망설이거나 재차 거절하는데 무도회에 너무너무 가고 싶어서 호박이라도 타고 싶었던 신데렐라와는 다른 점이다. 그런데 "무도회에 가고 싶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할 수 없이, 남의 인생에 비정상적으로 큰 관심이 있는 주변인에 의해 마지못해 끌려가는" 독립적인 현대여성이 신데렐라보다 진보했는가? 이것은 오히려, 시대의 요구에 의해 남자가 필요없다는 태도를 취하고는 있어야 하지만 결론은 남자가 연루된 해피엔딩으로 향해야 한다는 분열적인 내면을 반영하기 때문에 퇴보에 가깝다. 2016년작인 라라랜드의 미아조차 파티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가 친구들에 의해 끌려가는데,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노래부르며 드레스를 목에 걸어주거나 머리카락에 드라이 바람을 불어대는 장면은 분명 요정에 의한 메이크오버다. 다만 주인공이 "처음에는 주저했다는 것만" 다르다. 

직업이 있고 운신이 자유로운 1세계의 현대여성이 마지못해 끌려간 곳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난다는 설정은 비밀리에 낮은 평점을 받고 있었는지(혹은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여자들이 다른 설정을 찾기 시작했는지) 헐리우드발 로맨스 영화들은 슬슬 재수없지만 능력있는 직장상사와의 로맨스(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와 고향 불알친구와 재회해 고향으로 이사 가거나 이국의 시골에서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프로포즈 데이, 2012)를 밀기 시작했다. 이 중 도시의 빡빡한 삶과 오랜 남자친구와의 지지부진한 관계에 지친 커리어우먼이 갑자기 아일랜드나 뉴질랜드의 깡촌으로 날아가 마법같이 잘생긴 남자와 운명을 느끼는 줄거리가 최근 몇년간 독버섯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 역시 주목할 현상이다. 삼각관계가 반드시 등장하는 와중에 서로의 진심을 오해해서 비오는 밤길을 달리거나 공항을 향해 시속 150키로로 밟거나 읽어주지 않는 이메일을 백 통씩 쓰는, 이 클리셰로 점철된 이야기들은 일년에도 전세계에서 수백 편, 웹 드라마까지 포함하면 수천 편씩 생산된다. 이런 로맨스를 정말 아무도 참고하고 있지 않다면,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라고 90분의 환상특급을 탄 셈치고 사람들이 잊어버린다면 정말 이렇게 목숨이 질길까?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들에 대한 영향 때문에 우리는 태풍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만 짓는 관습을 지적해 결국 바꾸지 않았는가? 

너무 노골적인 반복은 자연히 사람들을 지루하게 한다. 로맨스 서사들도 충실히 캐릭터를 고치고 전개를 고쳤다.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은 험악한 위기를 설정해놓는가 하면(그만큼 극복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갑자기 부분적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는 등의 무리수로 중화해야 한다) 남자 주인공이 처참하게 못생겨지기도 한다(멜로가 체질, 2019). 이 와중에 가장 꿈을 크게 품은 로맨스 변화구는 단연 2015년작인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인데, 페미니즘의 아이콘까진 아니지만 자기 몸을 긍정하고(혹은 자기혐오를 긍정하고) 제 욕망에 충실한 것으로 유명한 에이미 슈머가 믿음직한 주연으로 등장한 데다 꽤 흥행했고 상도 여럿 받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에이미는 30대 중반의 커리어우먼이다. 여기만 다른 로맨스 영화와 비슷할 뿐 폭음, 캐주얼 섹스, 독설과 냉소로 무장한 주인공은 심지어 사랑을 믿지도 않는다. 술 마시고 물건 부수는 방귀 뀌는 신데렐라다. 영화 내내 대조군으로 나오는 농구팀 치어리더들과 비교하면 유연하지도 않고 상업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다(그런데 이런 에이미조차 평소 자기 몸과 음식을 긍정한다는 에이미 슈머가 목숨을 걸고 한 다이어트의 산물이다). 그는 어느날 친구들 손에 이끌려 파티에 가지도 않고 직장상사와 사랑의 줄다리기를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로맨스 영화를 가장 신랄하게 욕할 것 같은 캐릭터다. 그런데 그 역시 일하다 만난 의사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로맨스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고 심지어 일부일처제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사랑이 왔을 때 너무도 깜짝 놀란다.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로맨스 영화들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보다, 그래비티보다 치열하다. 에이미는 우주에서 사과나무를 발견한 사람처럼 충격을 받는다. 에이미의 친구는 "한번 잔 다음에 다시 전화가 오는" 남자는 범죄자가 틀림없다며 경찰에 전화하려고까지 한다. 절세미남에 선명한 복근을 가지진 않았지만 적당히 귀엽고 아방한 이 농구팀 주치의에게 단단히 반한 에이미는 공원을 거닐며 친구에게 "이 남자가 너무 좋아져서 큰일이다"고 고백한다. 적당히 좋아하면 나중에 분명히 찾아올 이별(혹은 천재지변이나 좀비 아포칼립스)에 담담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호소한다. 이제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성별간 권력차와 그를 덮기 위한 장치들이 작동한다는 신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도, 심지어 공주님을 만나도 이런 식으로 전전긍긍하는 남자는 로맨스의 역사에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우주최고존엄킹갓제너럴여신어쩌구를 만나도 일단 연애를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에이미는 이제부터 지적인 현대 여성의 공포와 열망과 모순을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캐릭터가 되는데 그것은 그가 이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출동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남자친구가 상 받는 격식있는 런천에서 와인을 폭음하고, 일부러 남자에게 못된 소리를 하고,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 싸움을 건다. 왕자는 죽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똥 싸는 나라도 사랑해줄, 술 먹고 미끄러져서 팔이 부러진 나를 병구완해줄" 유니콘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유니콘은 주인공이 제시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왕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데, 그래도 이 험난한 여정에 여자를 위한 살인이나 마약 거래, 인공자궁 이식 후 출산은 등장하지 않는다(아주 과감한 설정에서는 여자친구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잘 돌봐주는 남자가 등장하긴 한다). 여자들이 기대하는 정서적 서포트란 그저 살아있는 인간인 나를 인정하는 것뿐이지 실제 세계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빈번하게 요구하는 목숨을 건 정조나 조건 없는 신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험을 거쳐 남자를 유니콘으로 재발명하는 시도는 결국 "남들보다 운 좋은 나"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아름다운 나를 선택해주는 왕자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가 된다. 확률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안다. 운이 좋으려면 그만큼 많이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21세기의 여자들은 성에 확실히 존재하는 왕자를 만나러 무도회에 가는 대신 평범한 남자들을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많이 만난다. 미국 싱글 여성들의 성경이나 다름없었던 섹스 앤더 시티의 샬롯은 the one을 찾는 여정에 지친 나머지 "나는 열여섯살부터 데이트를 해왔어. 그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라고 울먹인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폭력전과가 없었으면 좋겠고 제대로 된 직업이 있으면 더 좋겠는 나의 유니콘. 섹스 앤더 시티에서의 주인공들은 "고추만 크면 된다"거나 "멀쩡하게 사회생활만 하고 있으며 된다"며 쓰리썸을 하고 싶어하는 남자의 요구를 꾹 참고 수용하거나 바람핀 과거를 용서해 준다. 그 유니콘들은 자주 유니콘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지만 여자들은 "너무 완벽한(다시 한번, 대량살상을 했거나 연쇄강간마만 아니면 되는) 남자가 나를 사랑할 리 없다"는 자기학대적 신념에 충실하다. 

 

다시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의 에이미에게로 돌아가 보자. 연애에 당연히 닥치기 마련인 시련은 그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강하고 지적인 이성애자 여성의 꿈의 유니콘조차 작정하고 밀어내는 데는 당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겁쟁이(남자의 용납 불가능한 *실수*를 눈감아주지 못하는 여성은 어째서인지 *겁쟁이*가 되는 서사가 미국발 로맨스에 존재한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걸 깨달은 그는 용감하게도 남자가 매일 마주치는 살아있는 바비인형 치어리더들에게 부탁해 화해를 요청하는 의미의 하프타임 댄스를 연습한다. 남자가 구애하기까지 기다리던 수치스러운 구습에서 벗어나 여자가 남자를 쟁취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치어리딩 댄스는 "용감한 일, 성별역할에서 벗어난 것"이 된다. 팬티보다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찢고 골반을 돌리는 춤을 추는 것은 매우 전형적으로 여성에게만 부여된 초과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에이미는 이 때만은 화려하게 꼬리날개를 펼친 수컷 공작이 된다. 

에이미는 결국 사랑을 쟁취하게 된다. 남자친구를 감동시키기 위해 치어리더 유니폼을 입고 덩크슛을 하다 바닥에 처참하게 추락하는 "귀여운" 방식으로. 이 "귀여움"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그나마 거울 속에서 찾아낸 자신의 사랑할만한 점이라는 것을 외면하면, 남자들이 여전히 레딧을 비롯한 남성향 사이트에서 "우린 첫날에 잠자리를 허락하는 여자를 여자친구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번째 세번째 데이트에서 비싼 레스토랑에 여자를 데려간 다음 불평하고 싶어한다, 그게 우리의 본심이다"고 고백하는 것을 모른 척하면, 그래서 용감하고 나의 욕망에 솔직하지만 동시에 와인을 너무 마시고 트름을 자주 하며 스물다섯살은 아닌 내가 내게 사랑스럽게 느끼는 점은 이렇게 다시 한번 남자의 육신과 목소리를 빌어 확인받아야 한다.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가성비 좋은 자취방 여친을 원하든 자기에게 지갑을 열게 하는 여우같은 여자를 원하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게 중요하지 않으려면 남자를 등장시킬 수 없고 남자가 등장하지 않으면서 독립영화가 아닌 로맨스 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 똑똑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세상을 충분히 아는 여자조차 유니콘의 니치 마켓에서 남자를 쟁취하려면 이상하고 모순적인 영역에서 헤엄쳐야 하는 것이다. 스트립 댄스와 매우 유사한 동작을 하는 것이 "용감한" 일이라 믿으며. 

인간은 본래 혼자이기 싫어한다, 사랑은 가슴으로 하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라는 금언들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기엔 시대가 너무 변했으며, 시대가 변했음에도 인간들이 안 변하지 않았을까? 미디어는 이제 이미 현실을 턱밑까지 추격해왔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은 초 단위로 스크린에 반영된다. 여자들은 베스트셀러 작가여도 남자친구 앞에서는 500불짜리 속옷을 입고 섹시댄스를 추어야 하며 친구들은 그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전투"라고 명명한다. 신데렐라가 하지 않았던, 하지 않았을 많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즐겁게, 심지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하는 것, 이것이 증거이다. 신데렐라가 에이미 슈머를 본다면 이해할 수 없어할 것이다. 에이미 슈머가 신데렐라를 본다면 경멸하거나 가엾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본질적으로 다를까? 우리는 the one을 찾는 여정을 거치기 위해 태어난 성별은 아닐까? 남자가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 다음에도 우리는 돈 내고 영화를 볼까? 더 정확히는 남자의 시선을 거쳐 확인하는 나의 가치 없이도, 우리는 즐거울 수 있을까?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온전한 여성이라고, 네가 남자에 목 매는 한심한 여자니까 세상에 그렇게만 보인다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섹시댄스를 전투로 해석하는 미디어의 목소리가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에 살기로는, 거기에 나도 당신도 기여한 바가 없다고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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