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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be

Bar Aluna에서

RomiT 2019. 11. 28. 23:02

걱정 많은 사람이 걱정을 떨치려고 여행을 와봤자 걱정을 늘릴 뿐이다. 나는 관광객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싶어서일부러 지금 묵고 있는 해변에서 god knows how far 산속 리조트를 예약했다. 필리핀 보홀엔 우버도 그랩도 없어서 택시비 담합이 가능하고 그래서 물가에 비해 택시비가 비싸다. 맥주 한병을 1500원에 파는 곳에서 1.2km거리를 만원에 간다고 하면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글지도 상으로 두어시간은 족히 걸릴 내 다음 호텔까지 갔다가 또 돌아오는 데 얼마나 들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나와 Despacito가 흘러나오는 바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글을 쓰고 있다. 휴양지 분위기에 취한 데다 밤의 용기까지 입은 백인 남자들이 두엇씩 무리를 지어 해변을 배회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좋지 않은 선택은 줄을 지어 더 안좋은 크고 작은 결정으로 이어진다. 언제 bad life choices의 업보의 사슬을 끊고 매몰비용을 모두 과감히 포기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나는 왕복 6만원 이상을 예상한다는, 오늘 강습을 받으며 친해진 Robert의 말에 또 자괴감의 구덩이로 흘러내리느라 바쁘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추천받은 bar로 들어왔다. 원래는 혼자 단백질과 섬유질이 많은 저녁식사를 하고 여기에서 럼 한잔만 한 후 기분좋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알로나 비치로 돌아올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다음 숙소들은 모두 네이버 검색으로는 나오지도 않는, 여기 사람들조차 듣도보도 못한 곳들을 골랐으니까.

내가 왜 그랬을까 습관처럼 자책하지만 나는 내가 왜 그랬는지 안다. 언제나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하고 미지의 어딘가로 도약하고 싶은 마음과, 잘 아는 곳에서 완벽하게 통제된 스케줄로 생활하며 계획소비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는 마음이 항상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놈이 이기면 다른 놈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가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하면 톡 튀어나온다. , 정찰제가 그리워, 다시는 동남아에 오지 않겠어, 라며 이를 갈다가도 겨울이 찾아오면 정말이지 나도 모르게 최저가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고 있으니 그 둘의 합의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일 가야 하는 산간오지의 그 리조트에 대해 다시 얘기해보자. 호텔 예약 사이트를 일주일 넘게 이잡듯 뒤져서 찾아낸, 바다를 면한 숙소가 대부분인 필리핀에 몇 없는 마운틴/정글뷰의 통나무집이다. 이백개가 넘는 리뷰에는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자그마한 인피니티 풀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답지만 찾아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진짜 문제해결을 또 내일의 나에게 미룬 것이다.

 

풀장의 물과 수평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빛나는 석양이 정말 너무 탐났다. 인생사진 한번 찍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언덕길이 너무 가파르다, 비가 오면 온통 뻘밭이 된다, 찾아가는 데 몇 시간이고 걸렸다는 리뷰란의 아우성을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무시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나는 필리핀의 아름다운 해변에 있을 나에게, 나는 지금 한국에 있고 너무 춥고 할일은 너무 많아, 그러니까 한가한 네가 알아서 해, 라고 좀 심술을 품었던 것도 같다. 기어이 휴양을 극기훈련으로 만들고 마는구나. 마치 여섯 살짜리를 풀장 다이빙대에서 밀어버리고 얼마나 헤엄 잘치나 보자던 그 수영 선생처럼, 나도 스스로를 부당하게 담금하는 데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좀 과장이 심하다. 어떻게든 될 것이다. 결국 택시기사의 바가지 가격을 담담히 수용하고 나서 차 안에서는 근심걱정과 자기혐오가 가득한 처연한 표정으로 실려가든, 가격흥정에 아주 조금 이기고 나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정신승리하든 나는 거기 도달하긴 할 것이다.

 

내 건너편에는 약한 텍사스 억양의 미국인이 자기 아버지같아 보이는 백발의 노인과 함께 앉아 쉴새없이 떠들고 있다. 그는 바 안의 필리핀 바텐더들에게 너희들 춤을 정말 잘 춘다고, 나이스 걸들이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아버지뻘의, 혹은 아버지를 데려와서 자기보다 20살은 거뜬히 어려보이는 여자애들에게 수작 거는 건 뭐하자는 건가, 나는 가끔씩 타자 치던 손을 멈추고 생각한다.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는 바텐더들이 미국인 앞에 붙어서서 자기는 목 마르다고, 술을 사달라며 함께 일하는 여자애들을 가리킨다. 쟤는 스물한 살, 쟤는 열아홉살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에게 가장 관심 보이는 바텐더 앞으로 옮겨 앉는다. 그는 샷을 약속했다가 술을 사려면 바텐더 모두에게 사야 한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 방금 자기 나이가 40이라고 했다. 저치는 열아홉짜리 필리피나와 데이트하려고 여기 온걸까, 태평양을 건너서.

 

오늘 다이빙 강습에선 솔트앤페퍼 그레이로 멋들어지게 머리가 센 한국계 미국인이 반쯤 패닉에 빠져 콧물을 줄줄 흘리는 나를 돌봐주었다. 그는 버지니아에서 피트니스 센터를 몇 개고 가진 사업가였지만 모두 정리하고 아시아를 여행중이라고 했다. 여기서 만난, 요가를 가르치는 필리핀인 여자친구가 있고 자기는 여자친구랑 다르게 미국에 돌아가서 가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줄곧 활짝 웃으며 세상엔 볼 게 너무 많다고 했다. 다이빙을 더 배워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라고, 세상에 갈 데가 얼마든지 더 많아진다고 하면서.

택시비 가지고 인생의 위기라도 맞은 듯 천 자 이천자 에세이를 쓸 수 있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자기의 실수에 대해 돌아보지 않는다. 나이 오십 육십을 먹어도 자기들은 천 살까지 살 것처럼 굴겠다고 한다. 윤기나는 새까만 머리에 화환을 쓰고 춤추는 어린 바텐더들에게 샷을 돌리러 수천킬로를 달려온다.

삼십육세에 이미 밤새 술 마실 체력도 없어진 나는 얼음이 다 녹아 싱거워진 바카디를 들이키며 생각한다. 미친놈들.

택시비 때문에 스스로를 두들겨패는 일은 그만해야겠다.

난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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