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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be

터널 빠져나오기 1

RomiT 2020. 4. 27. 22:05

2009 겨울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2 반을 만났고 약혼 얘기까지 나왔던 남자와 추하게 헤어진 후였다. 관계를 맺는 법도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도 관계를 끝내는 법도 몰랐던 나는 헤어지고도 그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냈다. 그러다 유독 그의 문자가 다정하다 느껴진 나는 술을 많이 마시고 택시를 탔다. 서초동 남부터미널 근처에 있는 익숙한 그의 오피스텔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서 소파에 쓰러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들렸는데 이상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여자가 생긴 거였다. 나와 예전처럼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 이미 집에 함께 드나드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여자가 현관의 신발을 보고 순식간에 사태파악을 다시 나가버린 거였다. 나와는 달리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한꺼번에 몰려오는 두려움과 수치심, 배신감과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벌벌 떨며 있는 나를, 그녀가 돌아와서 다시 데리고 나갔다. 남자에는 미련이 없지만 자초지종은 들어봐야겠다고 했다.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에서 우리는 긴긴 이야기를 했고, 서로의 타임라인을 맞춰본 후에 예의 바르게, 그러나 씁쓸하게 헤어졌다. 나는 아직도 겨울밤의 추위와 내가 신었던 연한 핑크색의 소가죽 부츠와 그녀의 우아한 스카프를 기억한다.

그러고도 나는 그와 끝내 헤어지질 못했다. 악다구니를 써가며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술도 먹고 독한 소리를 해가며 달을 만났다. 마침내 그의 거짓말을 이상은 견디게 되었을 , 나는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집에서 모로 누워 미드 하나를 번이고 번이고 반복해서 봤다. 밤에 먹고 낮에 잤다. 나이를 많이 먹어 눈도 보이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곤 하는 강아지를 옆구리에 끼고 숨죽여 울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가끔 그런 연인들을 만난다. 인생이 길고 지루한 마라톤일 군데군데 떨어진 덤불 같은 블랙홀인 그런 연인들.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어떤 블랙홀에서는 1초가 1 같고 다른 블랙홀에선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어딘가에서는 시간이 멈춰 버린다.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영혼의 일부를 불사르고 나온 다음에야 빠져나올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그런 연인이었다.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헤어져야 하는 종류의 관계였다.  

그러다 강아지가 죽었다. 누가 신문지에 싸서 버린 것을 데려다 십삼년을 키운, 엄마와 싸우고 나갈 때도 다른 짐은 챙겨도 들고 나왔던, 내가 거실에서 티비라도 오래 보고 있을라치면 빨리 들어가자며 나를 쳐다보다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나를 쳐다보고 하던 나의 작고 약했던 자폐증 . 새벽 세시에 여전히 불을 환하게 밝힌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곁에서 마지막 숨을 길게 내쉬더니 그대로 끝이었다.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기계적으로 출퇴근만 하고 다른 기능은 전혀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술을 마셨고 낮에는 두어시간 쪽잠을 후에 황급히 출근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래도 밤마다 마시는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가족의 시선에서 탈출하려면 그나마 벌러 떠났다 돌아오는 자식의 연기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퇴근길에는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를 후에 내용물을 쏟아 버리고 팩소주로 채워 손에 들고 전철에 탔다. 집에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정신이 말짱한 것도 견딜 없었다. 소음도, 사람들도, 시선도, 음악도, 무엇도 견딜 없었다. 빨리 의식을 둔하게 만들어서 아무것도 느끼는 상태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술을 항시 마셔도 잃어버리거나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알코올은 내게 방패막이었다. 매일 매시간 매초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부터 너무도 잘못 나머지 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부 잘못이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로 깨어있는 시간 모두를 보냈다. 아니 깨어있지 않은 시간까지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하며 보냈다. 집에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우면 그때부터는 돌아눕는 것도 싫었다. 모로 누워 소리없이 시간이고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에 불을 환히 켜고 앉아서 뭔가를 한참 생각하다 울었다. 나는 삶이 두려웠다. 지금 떠올리면 어떻게 죽거나 사라져 버리지 않고 시간을 헤어나왔는지 스스로가 경이로울 정도로 나는 모든 두려웠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밤들이 떠나가지 않고 안에 남아있는 느껴진다.

나는 당시에 여의도에서 특목고 대비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의 좋은 대학이나 영어권의 대학에 가고 싶은 십대를 가르치는 일은 보수는 좋은 편이었지만 일분 일초가 사춘기 아이들의 냉담함과 치르는 전쟁이었다. 방학이 대목인 학원가는 한여름과 한겨울이 가장 바쁜 때여서 나는 일곱 시간씩 앉지도 쉬지도 못하고 강의를 했다. 화장실에 시간이 없어서 방광염을 달고 살았고 겨울에 감기에 걸리면 거의 반드시 링거를 맞아야 다음날 출근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헤매던 와중에, 특히 지독한 불면에 시달리던 와중에 겨울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하는 길은 일밖에 없었다. 강의하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이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고 돈을 벌어서 삶의 다음에 뭐가 있으리라는 희미한 증거를 만들어두는 것밖에 남은 없었다. 어떻든 출근해서 강의는 해야 했다. 친구의 추천을 받아 정신과에 갔다. 상담을 신뢰하진 않았다. 주변에 상담을 받는 이들이 많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약을 받아야 했다. 밤에 자야 사람 잡는 스케줄을 버텨낼 있을 거라 생각했다. 조용하고 답답하고 따뜻한, 창문 너머로 헐벗은 언덕이 희미하게 보이던 원장실에서 나는 처음에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그리고는 말문이 터짐과 동시에 울기 시작해서 45 내내 울기만 했다. 회에 십만원씩 하는 상담료가 너무 비싸 고작 한달 다니고 가고 말았지만 어쨌든 상담실에서는 기억밖에 없다. 처방받은 수면유도제가 들어 그해 겨울의 특강은 무사히 넘겼다.

문제는 삶을 되찾는 것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이 큰 힘이 되어주었지만 우리 삶의 궤적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마음 먹고 모이기도 힘들었거니와 만난다 해도 연애 얘기와 주변인 소식 외에는 할 얘기가 없어 좀 지나친 열의를 담은 시끄러운 한두시간이 지나면 당황스러운 침묵이 흐르곤 했다. 우리는 이제 정치와 종교, 각자의 예민한 신념에 대해서는 알아서 조심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서로의 온전한 결심에 의해 갈라지지는 않은 그런 시절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그리웠고 또 서로가 못마땅했다. 그때는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우리는 새로운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아서, 혹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전공을 했기 때문에 서로를 맘 먹고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그 흥분의 이면까지는 함께 걸을 준비가 안 되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부족이 절실히 필요했다. 인터넷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밈이 돈 지는 꽤 되는데, 내가 인터넷 친구를 신뢰한 것은 아마 온라인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무수한 시도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어색하게 만나 찜찜하게 헤어져 돌아온 일도 꽤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가상의 골짜기 어딘가에서 또라이 같고 동생 같고 언니 같고 가끔 선생님 같은 친구를 발견하는 것은 너무도 신나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21세기의 유일한 기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한번 인터넷을 믿었다. 때마침 누군가 모집하기 시작한 트위터의 북클럽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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