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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주양육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아마 지나친이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서재에 꽂혀 있던 육아서 두 권은 아이는 유태인처럼 키워라스파르타 교육법이었다. 대체 유태인이 무엇이고 스파르타는 무엇인지 궁금해서 여러번 책을 뽑아 읽기를 시도했기 때문에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격하고 진지하게 자녀의 교육에 임하라는 것이 골자였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고 새까맣고 번들번들하던 표지만 떠오른다.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가 뭔가를 틀리면 크게 낙담했다. 학교 시험이든, 피아노 레슨에서의 손가락 놓는 자리이든, 티브이를 보다가 무심히 물어보는 상식 질문이든. 내가 오답을 말하는 순간, 손끝이 엇나가는 순간, 혹은 질문에 답하기를 머뭇거리는 순간 우리가 즐겁게 하고 있던 모든 것이 취소되고 엄마는 문을 쾅 닫고 방에 들어갔다. 별 일이 없어도 엄마의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당시 망원동에서는 전례가 없던 대치동 과외선생을 모셔다 단체로 중학교 입시를 준비시켰는데, 숙제로 푼 수학문제를 반 넘어 틀린 것을 엄마가 보고는 거의 한시간 동안 이를 악물고 나를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머리통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뺨을 갈기고 발로 등을 걷어찼다. 아직도 생각하면 온몸이 저리다. 그래도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과외수업을 받으러 갔다. 딸꾹질은 멈추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서면 골목의 담장 너머로 핀 단추장미 덩굴을 따라 걸으며 입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아이들과 수업을 받고 집에 다시 들어가는 길은 지옥 입구 같았다.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채 누르지 못하고 오래오래 그 버튼을 바라만 보며 서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건 순전히 엄마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 궤도 바로 그 시점에 나는 거기 있었으면 안 되었다. 이상적인 세계였다면 누군가 나를 구조했어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얻어맞는 아이에게 그나마 가장 안전한 물리적 공간이 학대자가 제공하는 가정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어쨌든 울고 맞고 때로는 소리치고 대들고 다 죽여버릴까 아니면 내가 죽을까 고민하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밤을 새면서 살아남았다.

 

그래도 너네 엄마 아빠 덕에 네가 이만큼 책을 읽었고, 공부를 했고, 건강하고, 너희 부모가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며 뭘 해다줬는지 아니, 애를 쓰고 피를 말렸는 줄을 아니라는 주변의 말도 신물이 나게 들었다. 모두 내 몸의 피멍을 외면한 사람들이었다. 학대가 무언지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지구상에 지금의 형태로 존재한지는 채 오백만년이 안 되었다. 우리는 침팬지와 유전자상으로 99.8% 일치한다. 침팬지와 헤어진 후 두개골이 이렇게 커진 것이 먼저인지 직립하기 시작한 것이 먼저인지 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먼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아마 거의 동시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거라고 한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며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사용했고 이로 인해 폭발적으로 커진 뇌의 용량 때문에 이미 두개골이 발달한 상태로 어미의 산도를 통과하는 출생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었다. 모체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동반하는 경험이며 회복도 느리다. 태어난 개체는 십수개월이 지나기까지 걷지도 못하고 똥오줌도 못 가린다.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오기까지는 선사시대에도 7-8년은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구상의 많은 국가에서 산업화가 완료된 21세기에는 출생 후 20년이 지나도 밥벌이를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20년 동안에는 경쟁력을 갖추고 비교우위를 점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 각종 교육비가, 인력이, 사회자본이, 무엇보다도 주양육자인 어머니의 삶이 대부분 투입된다. 지구상에 남은 가장 거대한 포유류 중 하나인 인간의 재생산은 이렇게 재미없고 길고 복잡하고 비싼 과정이 되었다.

 

우리의 창조자들이자 양육자들은 이것을 알았을까? 아마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인간을 하나 만들어서 기른다는 것이 무지개가 걸린 꽃밭을 노니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이 살아갈 완전히 다른 시대의 압도적인, 무심한 속도감과 그저 한 개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기에는불필요할 정도의 교육과 정보량에 따른 의식화, 그리고 거기 자연히 딸려오는 좌절과 무력감과 우울은 아마 계산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 교육은 불행히도 효율적인 소시오패스를 배출하는 코스와 양심적인 문명인을 만드는 코스를 완벽하게 분리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모두가 약간씩 분열된 상태로 대학을 졸업한다. 비싼 돈 들여 먹여 놨더니, 공부시켜 놨더니, 운동 보내 놨더니, 대체 투입한 만큼 산출하지 못하는 저 미지의 인간을 향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증오의 감정도 헤아려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을 미워한 이후에 느끼는 죄책감과 또 반발심처럼 솟아오르는 끈적하고 어두운 종류의 애정에 대해서도 마치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통해 보는, 돌아버린 외국인 엄마만큼 자기와 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딱 그만큼 가엾어지고 허무해지는 나 자신의 인생과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할지도 진지 빨며염려한 다음에 가족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상상의 며느리나 사위에 손자까지를 끼워넣은 가족사진을 상상하고 그 안에서 재생산에 성공한 당당한 자신의 미소를 상상하고 남들이 다 가졌다는 집이나 차처럼 가족을 갈망한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반드시 있을, 당연히 약속받은 그 가족.

 

물론 세상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얼만큼을 내가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돌려받아야 한다는, 그게 아니라면 감사하고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그런 종류의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네가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확인한다는 류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 사랑도 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은 조건이 없기 때문에 혈연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너는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므로 무언가를 증명함으로써 살아있는 값을 하라는 치졸한 욕망을 투사해서도 안된다. 조건없는 사랑은 사실 혈연관계에 제한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랑일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난데없이 신의 자비를 갈구하듯이, 갑자기 맥락 없이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라듯이, 조건 없는 사랑은 상대가 나와 얼마나 DNA를 공유했나를 따지는 것과는 많이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그 터무니 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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