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의 지시가 떨어진 이후로 나는 재택근무를 하며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았다. 필라테스 스튜디오도 크로스핏 짐도 닫은 상태에서 아주 마음 놓고 운동마저 놔 버렸다. 운동하지 않는 게 더 안전하다잖아, 같은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입속에서 중얼대며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홀린 것처럼 옛날 시트콤을 봤다. 시작은 왓챠에서 400회도 넘는 방영분을 모두 모아 송출해주는 이었다. 내가 대학 신입생이던 때와 비슷하게 겹치던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이 20분짜리 꽁트는 박경림, 장나라, 조인성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배출했고 숱한 유행어가 세상 빛을 보게 만들었었다. “한 턱 쏴!”나 “오바다”같은. 내가 예전을 그리워한다는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와 주양육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아마 “지나친”이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서재에 꽂혀 있던 육아서 두 권은 “아이는 유태인처럼 키워라”와 “스파르타 교육법”이었다. 대체 유태인이 무엇이고 스파르타는 무엇인지 궁금해서 여러번 책을 뽑아 읽기를 시도했기 때문에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격하고 진지하게 자녀의 교육에 임하라는 것이 골자였던 것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고 새까맣고 번들번들하던 표지만 떠오른다.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가 뭔가를 틀리면 크게 낙담했다. 학교 시험이든, 피아노 레슨에서의 손가락 놓는 자리이든, 티브이를 보다가 무심히 물어보는 상식 질문이든. 내가 오답을 말하는 순간, 손끝이 엇나가는 순간, 혹은 질문에 답하기를 머뭇거리는 순간 우..
2009년 겨울 나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2년 반을 만났고 약혼 얘기까지 나왔던 남자와 추하게 헤어진 후였다. 관계를 맺는 법도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도 관계를 끝내는 법도 몰랐던 나는 헤어지고도 그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냈다. 그러다 유독 그의 문자가 다정하다 느껴진 밤 나는 술을 많이 마시고 택시를 탔다. 서초동 남부터미널 역 근처에 있는 익숙한 그의 오피스텔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서 소파에 쓰러졌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현관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는 들렸는데 더 이상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에게는 새 여자가 생긴 거였다. 나와 예전처럼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 이미 집에 함께 드나드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그 여자가 현관의 내 신발을 보고 순식간에 사태파악을..
2월 27일 미 국무부가 한국여행 경보단계를 3단계로 격상시켰다. 확진자는 밤새 300명이 넘게 늘었고 대부분 대구에서, 신천지 신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이틀 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친구는 LA 한인타운 분위기도 뒤숭숭하다며 대한항공 승무원이 다녀간 식당들이 발칵 뒤집혔다고 했다. 유나이티드에서 한국 출항 여객기를 줄인다는 말이 돈다는 와중에 델타는 이미 한국 항공편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신용카드는 찾을 수 없고 나는 무기력증이 절정에 달했다. 스스로의 판단력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기상황에 자기를 믿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손톱을 씹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여행이 꼭 필요했다. 연초에 감정이 크게 닳아진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해 있었다. 나는 ..
걱정 많은 사람이 걱정을 떨치려고 여행을 와봤자 걱정을 늘릴 뿐이다. 나는 “관광객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싶어서” 일부러 지금 묵고 있는 해변에서 god knows how far 산속 리조트를 예약했다. 필리핀 보홀엔 우버도 그랩도 없어서 택시비 담합이 가능하고 그래서 물가에 비해 택시비가 비싸다. 맥주 한병을 1500원에 파는 곳에서 1.2km거리를 만원에 간다고 하면 그러자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구글지도 상으로 두어시간은 족히 걸릴 내 다음 호텔까지 갔다가 또 돌아오는 데 얼마나 들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 혼자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나와 Despacito가 흘러나오는 바에서 어울리지도 않게 글을 쓰고 있다. 휴양지 분위기에 취한 데다 밤의 용기까지 입은 백인 남자들이 두..
사람들은 신데렐라 스토리가 너무 뻔하다고, 반복되고 지루하다고 불평한다. 세상의 모든 유명한 로맨스는 여자가 왕자님을 만나는 이야기라며 경멸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로맨스는 분명 변했다. 맨하탄 한복판에서 몸을 팔던 여자가 젠틀하고 부유한 사업가를 만나 메이크오버(드레스와 유리구두, 호박마차를 연상케 하는)를 거친 후 약간의 역경(유리구두를 떨어뜨리고 성을 탈출)을 거쳐 결국 그의 성으로 떠나게 되는 해피엔딩이 불과 1990작인 프리티 우먼이라면, 2천년대에 들어서 드디어 여자가 재투성이 아가씨이거나 성판매자는 아니게 된다. 주인공 여성들은 이제 섹스 칼럼을 쓰거나, 여행사에 근무하거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거나 혹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의사도 있고 변호사도 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가 있으며..
상대가 나에게 감탄하는 순간, 매료되는 순간의 그 감각, 무언가를 혼자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가능성, 나에게서 어떤 가치를 발견한 사람에 대한 애착, 동시에 드는 의심, 두려움, 즉각적으로 승인과 안도를 바라는 마음, 나를 남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발생, 내가 둘로 쪼개짐, 자기검열의 시작, 가벼운 자기혐오, 상대의 입장으로 내 입장을 이동시키려는 거대한 전환의 시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단순한 탐구가 복잡한 쌍방의 욕망 미리읽기로 바뀜, 내가 가졌던 모든 가치를 상대를 기준으로 재배열하려는 움직임의 시작, 상대에게로 끌려가는 거대한 관성이 생김, 그러나 사랑이 아님. 사랑이 아님. 이 시점에서 이미 "사랑은 준비되어" 있으며 작은 경고들을 무시하기 시작함 상대를 사랑할 이유/상대..
인간은 퇴보할까? 퇴보한다. 권력에 눈이 멀거나 노쇠로 인한 사고의 둔화 같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의 퇴보가 일어난다. A라는 총명한 인간이 있다. 그는 월반을 하거나 학점을 전부 A 받거나 이름이 크게 나거나 박사학위를 일찍 따거나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선망하거나 질투해 미워하거나 그 둘을 동시에 하며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바쁘게 길 가는 그를 불러세워 자질구레한 질문을 하든지 별것도 아닌 그의 필기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역시 영재의 물건은 이래서 다르다며 헛소리하는 식이다. 총명한 인간은 보통 이런 식의 관심을 못마땅해한다. 그저 귀찮은 게 아니라 바람직하지가 않다. 그는 자신이 천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천재를 망치는 빠른 길 중 하나가 그의 업적 ..
나는 스물아홉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두 개의 적금통장에 들어 있던 칠천만원을 모두 달러송금이 가능한 시티은행 계좌에 옮기고 외고와 자립형 사립고, 국제고에 진학하고 싶은 중학생들에게 스물세 단락짜리 토플 지문 가르치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는 한번도 가본 적 없었던, 영화에서나 보던 뉴욕으로 떠났다. 같은 해 여름 길에서 주운 노란 진돗개 믹스를 데리고. 나는 죽지 않았고, 강도당하지 않았고, 총 맞지 않았고, 사기당하지 않았다. 운명의 상대나 중동 부자를 만나지 않았고, 석사취득과 동시에 기적적으로 미국 학교에 선생으로 취업하지도 않았고, 갑자기 한식 사업가로 변신하지도 않았다.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그래도 내 삶은 지진이 난 것처럼 변했다. 나는 내가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아 기를 사람이라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