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못하는 게 아닌데 영어회화는 못한다는 학생들을 자주 만난다. 토익을 비롯한 영어공인능력시험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고(요즘 영어시험 성적이 다들 좋아서 토익 700점 정도는 잘 본 것도 아니라는 자조 섞인 한탄을 대학생들에게서 듣는데, 사실 ETS에서 제시하는 성적 기준표를 보면 토익 600점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영어권 국가에서 일할 수 있는 정도인 중상급의 언어실력을 가진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 결코 영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가 아니다.) 수준 높은 영단어도 많이 아는데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주말에 뭐 했는지, 이번주에 뭐 했는지 말해보라고 독촉했을 때는 이런 항의를 듣기도 했다. "나는 한국어로도 내 얘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 얘기를 ..
한때 유명했던 사고실험이 있다. 둘로 갈라진 레일이 있고 한쪽 레일엔 열차 오는 소리를 못 듣고 일하는 노동자가, 다른 쪽 레일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꼼짝할 수 없게 묶여 있다. 내가 저만치서 달려오는 열차의 선로를 변경하면 남자가 열차에 치어 죽겠지만 다섯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나는 레버를 당길 것인가?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한 명의 목숨은 다섯 명의 것보다 덜 소중한가?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레버를 당기지 않는다면 다섯 인간의 목숨에 나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트롤리 사고실험"으로 알려진 이 질문은 여러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심술궂기도 하고), 무인자동차에게 "토끼를 치고 더 큰 사고를 피할 것인지 토끼를 살리고 사..
뉴욕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평년보다 따스한 날씨가 지속되다 갑자기 밤새 기온이 뚝 떨어졌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불평할 여유도 없을 만큼의 숨막히는 추위에 꾸물꾸물한 회색 하늘이 내가 처음 만난 뉴욕이었다. 검색대를 거쳐 밀고 나오다 너무 무거워 세 걸음에 한번씩 나를 멈추게 했던 이민가방에는 생뚱맞게 김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 있었다. 집에서는 마치 캠핑 떠나는 사람처럼 코펠을 싸주었고 나는 저항할 힘도 없어 그 짐을 들고 비행기를 탔었다. 한번도 자식을 유학보낸 적 없는 부모는 휴대용 냄비와 대용량 포장된 김을 커다란 짐가방에 쑤셔넣으며 주문처럼 다 필요할 거라고 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배낭에 크로스백 하나에 커다란 이민가방, 그리고 또 더플백이 하나가 있었다. 기내에..
나에게는 오랜,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손톱 주변 피부를 뜯어내는 것, 그리고 일명 "돼지털"이라 불리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골라내서 뽑는 것. 손끝을 쥐어뜯는 버릇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머리카락을 뽑는 건 중학교 때 시작되었다. 손끝은 가을이 되면 건조해진다. 말랑하던 부분이 굳어지며 다른 손가락으로 건드리기 좋게 각이 잡힌다. 특히 손톱 주위의 거스러미가 그렇다. 매끈하지 않은 그 피부의 요철을 마치 염주 세듯 손가락 끝으로 쉼없이 매만지며 마음의 안정을 얻다가 툭, 잡아뜯어 곧잘 피를 보곤 했다. 피부가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면 염증이 생겨 부풀어 오르거나 딱딱하게 굳는다. 그러면 만질거리가 더 생기는 셈이다. 뜯어내는 부위가 확장된다. 고등학생 때는 증세가 너무 심각..
나는 면으로 만든 모든 음식을 좋아한다. 인스턴트 라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만 파는 쑥갓을 많이 넣은 우동, 호로록 마셔버릴 수 있는 가늘고 매끈한 면발의 멸치국수, 그리고 포크로 돌돌 감아 입 안에 넣을 때 코로 향이 훅 끼치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까지. 8분간 잘 삶은 알덴테가 아니어도 된다. 아니 오히려 물을 넉넉하게 넣고 좀 불다시피 끊인 너구리 면발이 제일 좋다. 아무렇게나 요리했건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그래도 라면 아닌, 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을 땐 우선 레시피 비디오부터 검색한다. 어차피 결국 마트에서 금방 집어올 수 있는 재료만 들어가고 30분 이내에 조리 가능한 레시피를 고르겠지만 눈이 즐길 수 있는 성찬은 공짜니까. 그렇게 화려하고 이국적인, 보글보글 끓고 냄비 속으로 휙휙 들..
인간은 퇴보할까? 퇴보한다. 권력에 눈이 멀거나 노쇠로 인한 사고의 둔화 같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의 퇴보가 일어난다. A라는 총명한 인간이 있다. 그는 월반을 하거나 학점을 전부 A 받거나 이름이 크게 나거나 박사학위를 일찍 따거나 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선망하거나 질투해 미워하거나 그 둘을 동시에 하며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바쁘게 길 가는 그를 불러세워 자질구레한 질문을 하든지 별것도 아닌 그의 필기구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역시 영재의 물건은 이래서 다르다며 헛소리하는 식이다. 총명한 인간은 보통 이런 식의 관심을 못마땅해한다. 그저 귀찮은 게 아니라 바람직하지가 않다. 그는 자신이 천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천재를 망치는 빠른 길 중 하나가 그의 업적 ..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혹은 썸이라도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가슴 철렁하는 순간을 알 것이다. 이유 없이 문자 간격이 벌어지고, 메시지를 읽고도 답신이 없거나 영혼 없는 "ㅎㅎㅎ"만 날아오는 일이 많아지고,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하는 일이 생긴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아니야, 요즘 회사가 바쁘다잖아? 마감이 코앞이라잖아?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많이 부었다잖아? 내 기분 탓일거야. 그러나 슬프게도 문자 간격은 더욱더 벌어져 기다리다 지친 내가 전화를 하는 지경이 되고, "ㅎㅎㅎ"조차 반갑고, 한 번 미루었던 약속에 대해 언제 다시 얘기를 꺼낼까 가슴 졸이며 기다려도 말이 없다. 그렇게 결국 연락이 끊긴다. 이런 식으로 이별을 겪는 건 여러 이유로 최악의 경험이다. 관계를..
나는 발리를 참 좋아한다. "신들의 섬"으로 잘 알려진 아름다운 열대의 섬. 어딜 가나 풍성한 녹색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곳, 바다도 산도 깊고 푸른 곳. 내가 발리에 반한 순간은 길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짜낭(canang)을 발견했을 때였다. 바나나 잎과 얇게 자른 대나무를 엮어 만든 손바닥만한 바구니에 색색의 꽃과 약간의 과자, 혹은 쌀밥을 넣어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인 짜낭은 깊은 산의 계곡에도 면세점 바닥에도 놓여있다. 안에 든 약간의 음식은 거리의 개나 고양이, 원숭이들이 먹는다. 색 바래져가는 꽃과 향 태운 흔적만이 남은 짜낭은 해질녘이 되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채여 온통 찌그러지고 때가 타는데, 발리 사람들은 눈 꿈쩍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새 짜낭을 그림같이 예쁘게 만들어 ..
1st week시제- 시제는 영어의 맥락을 얼마나 바꿀까? 현재완료와 진행형을 중심으로 여러 시제 살펴보기 참고: http://pupper.tistory.com/18?category=967451 2nd week감정 형용사- "기분 나빠,"를 넘어서서 좌절, 모욕, 불쾌, 소외 등의 감정을 언어화하고 적절한 형용사로 서술하는 연습 참고: "kibun과 feelings:나는 오늘 어때?"http://pupper.tistory.com/15?category=967451 3rd week동작 동사(phrasal verbs)- 언어를 시각화하기 참고: "'언제 날아왔어?'가 무슨 말이냐고? 구동사(phrasal verbs)의 숨은 힘" http://pupper.tistory.com/47?category=967451 ..
나는 12주 과정의 한 학기짜리인 영어수업을 운영한다. 영어교육을 전공하고 여러 문화권의 여러 언어 사용자들을 가르쳐본 후에 내린, 바이링구얼리즘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것을 실감할 기회가 어학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수업계획들이다. 그 중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션 중 하나는 한국어 감정을 영어로 옮기는 수업이다. 영어 서사의 특징 때문이다. "아침 8시에 일어나서 참치김밥을 먹었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식으로 사건을 나열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한국어 서사와 달리 영어는 "우리는 사방의 창이 모두 푸른 숲을 향해 나 있는 박사의 주방에서 마호가니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처럼 시각 정보를 중히 여긴다.또 하나 중요한 영어 서사의 특징은 ..